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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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9절, 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홍정호 전도사 (2012.6.24. 성령 강림 후 제4주)



1. 



여러분,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 강림 후 네 번째 주일이면서 올해 상반기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남과 북의 막힌 담을 더욱 공고히 느끼게 만드는 때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사이에 높이 쌓인 장벽을 허물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기를 소원합니다. 

벌써 일 년의 절반을 살았습니다. 올 한 해 여러분들은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모두 같은 6개월이 지났지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체감하는 시간의 질은 아마 각기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지난 6개월이 마치 시간의 한 단위처럼 빠르게 느껴지실 테고, 또 어떤 분에게는 하루하루 또렷이 날수를 세면서 지날 만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사정이 어떻든 우리는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지난다는 것, 그래서 그만큼 나이를 먹고 산다는 것은, (외람된 말씀이겠습니다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가 막히는 경험들을 통해 시간의 무늬가 삶에 새겨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마치 한여름의 땡볕과 모진 비바람을 모두 견디며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있는 나무의 속살에 나이테가 새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무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인 나이테가 그 나무의 생을 증언하듯, 우리의 삶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들은 우리의 말과 겉모습으로 가릴 수 없는 오늘과 내일의 ‘나’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면 무엇보다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이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내면 깊은 중심에는 어떤 시간의 무늬가 그려지고 있는지 지금쯤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힘들고, 피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이 모든 일들과 더불어 우리의 생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꿔나가시는 분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번 믿음에 관한 설교에서도 함께 나눈 말씀처럼, 유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우리의 믿음과 열심을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참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지난 번 말씀드린 향주삼덕 가운데, 희망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 

오늘의 본문이 기록된 베드로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호소력 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글 첫머리에 저자는 이 서신을 베드로가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성서학자들은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정말로 이토록 아름답고 세련된 희랍어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하여 베드로전서는 아마도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서 씌여진 것이 확실시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글에 사도적 권위를 덧입히고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효과를 위해 베드로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저자와 기록연대의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전서의 기록목적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독자들을 격려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역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적 삶의 비전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이 확신이 공동체에 불러일으킬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의 공동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집단이기에 고결한 삶이 요청되며, 필요하다면 고난과 고립화의 위험을 무릅써야하는 동시에 공동체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희망을 선한 사역으로써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전서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희망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3.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신경정신과 전문의 한 사람이 시사주간지에 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노인 같은 젊은이들이 행복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글인데,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었습니다.[시사저널 2012.6.6.] 내용인 즉 우리나라의 청소년들 대부분이 나이보다 피곤하고 아주 많이 나이 든 노인들 같아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짝만 이야기를 건네 보아도 지친 노인들처럼 말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데, 통계상으로도 한국 아이들은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살 충동도 더 많이 나타내고 있으며, 우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많은 아이들의 마음이 병들고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현장에서 많은 아이들과 접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갖게 된다고 합니다. 저소득층 아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부모의 방치 때문에 비뚤어져가고, 고소득층 집안의 아이들은 또 그들대로 부모의 지나친 과잉 통제와 기대, 절제를 모르는 생활로 무기력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죽어라 ‘스펙’을 쌓아도 취직도 힘들고, 결혼 비용도 없어 독립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세대라고 자조합니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경제적인 여건상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하는 세대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과거 대학만 나오면 얼추 취직이 되던 기성세대와 비교해 정말 엄청나게 노력해도 결과가 그만큼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것이 요즘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반면 기술의 발전과 정보의 홍수로 경쟁은 과거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극심해 졌습니다. 반면 바닥부터 차근차근 헤쳐 나가려는 배짱과 용기는 확실히 이전 세대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새마을 운동을 벌이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일해도 보람과 만족을 느끼던 전후세대의 헝그리 정신을 요즘 청소년들에게 요구하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의 성실성의 문제로 돌리기에 계층 간의 격차가 이미 너무 커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그러니 아이들, 청소년들, 청년들이 꿈을 갖기도 전에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꿈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많은 아이들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공무원이라고 답하는 아이가 많다고 합니다. 설명이 더 걸작입니다. ‘안정되잖아요. 잘릴 걱정 안 해도 되요. 연금도 나와요…’ 등등 중년의 아저씨·아줌마들이나 할 얘기가 아이들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이들이 허황된 꿈을 꾸는 세상이 아니라 현실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희망으로 말하는 세대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만약 젊은이들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인생을 꿈꾸고 설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이 부모들이 짜 놓은 인생의 계획대로 그저 순탄하게만 살아간다면, 그러면서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 없이 타인의 시선에 이끌리는 삶을 사느라 자기를 잃어버리고 산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모습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4. 

희망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데 이런 무거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희망을 품어야 하는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 때문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채 무조건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만큼 공허한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선거를 앞둔 대중적인 정치인들의 주된 발화의 코드입니다. 그들은 꼭 필요한 말, 해야 할 말이 아닌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일들을 위해 분투하기보다는 말의 효과를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데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대중적인 목회자들도 같은 유혹을 당합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위해,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성장을 위해 쓴 소리를 하고 꾸짖을 수 있는 목회자들은 요즘 세대에 참 드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조 있고 올곧은 선생님과 같은 목회자들보다는 정치인과 같은 목회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업고 성공하는 세상입니다. 해야 할 말, 영혼의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해야만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혹은 상대방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희망을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티브이나 라디오에 나와 긍정의 힘을 전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공허하게 들릴 수 없습니다.



5.

희망은 현실에서 떠난 저 어딘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의 자리, 바로 이곳으로부터 솟아나는 힘입니다. 철학자 김진석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희망은 현실의 초월(超越)이 아닌 포월(匍越)로부터 생겨납니다. 현실을 뛰어서 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몸으로 기어서 넘어갈 때 솟아나는 힘,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이 자리를 떠난 저기 어딘가에서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몸으로 기어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덮어두고 저 세상으로 뛰어넘어가는 초월은 진정한 의미의 극복이 아닌 도피일 뿐입니다. 초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악화시키고 이로써 건강한 해결을 지연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를 단숨에 건너 뛰어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참말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무슨 특별한 능력의 체험을 통해 단숨에 고통스러운 삶을 뛰어 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된 저 세상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서 기도하자는 권면을 하는 까닭은 기도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담대함과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7,80년대 한국에는 기도원운동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그만큼 기도에 대한 오해도 많았습니다. 여러 문제에 직면해 며칠을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하느님께 매달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고 부르지는 것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원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기도원을 내려온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어 이 예배당을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에 발목을 잡혀 절망하지 않고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엡6:12)인 것입니다. 현실을 하나하나 몸으로 마주하며 기어서 넘어가는 포월의 정신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 움트는 자리입니다.



6.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조건들이 아닙니다. 소유가 많고 적음, 지식의 많고 적음, 건강과 쇠약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말씀처럼 이런 것들은 허황할 따름입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전 9:11)

우리가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누군가에게 우리의 마음을 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니 우리는 그걸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비참함에 빠진 당신의 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고 힘을 내십시오. 세상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당신은 하느님께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희망의 이유에 대해 증언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생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일순간 좌절시킬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는 없다는 믿음, 하느님이야말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친히 내 길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의 참된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로 이 희망의 이유에 대해 성도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희망의 이유를 발견하고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사는 저와 우리 모든 신반포교회의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