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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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의 조건


본문: 마가복음 1장 14-15절, 로마서 8장 1-2절
신반포교회 홍정호 목사 (2013.5.26. 웨슬리회심 기념주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 목사의 회심 27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경,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해 어떤 이가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날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과 주님의 은혜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올더스게이트의 체험 이전에도 웨슬리는 경건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하느님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삶을 다짐하며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에 매진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흠 잡을 데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절제되고 경건한 삶, 그리고 신학교리에 대한 그의 수준 높은 지식들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앎’과 ‘삶’ 사이에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회심의 체험은 별로 극적이지 않습니다. 일기장에는 그저 그날의 일들과 감정의 변화가 차분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의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들이 마음으로 믿어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확신을 심어 주었고, 이후 웨슬리는 그의 시대 잠자는 이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을 맞아 회심을 주제로 몇 가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회심(回心)이란 글자 그래도 ‘마음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의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가 어디인가에 대한 자각이 하나요, 우리가 그 본래의 장소로부터 멀어졌다는 깨달음과 인정이 다른 하나입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지, 타종교인을 배척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초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실한 타종교인들은 오히려 우리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덜어내고, 자기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부처님 앞에 공손히 합장하는 이웃종교인은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벗이 될 수 있지만,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성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차라리 이름만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 하느님을 더욱 충실히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기준음이 되어, 우리의 삶을 여기에 맞게 조율해야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연주자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이라도 조율이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준음은, 비록 그것이 임의적이고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 행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 됩니다. 제가 ‘임의적이고 한계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일들에 대해 권위를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자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신앙이라는 악기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비판자와 방관자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기준음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준음 자체가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음이 있어야 악기를 조율하고, 음악을 연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란 이런 뜻에서 우리의 기준음이 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자면, 하느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는다는 것은 성경말씀의 구절 그 자체의 의미에 집착해야 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attitude)에 우리의 삶의 초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과 ‘복음적’이라는 낱말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이라는 명사에 집중하면, 우리가 ‘복음’이라고 스스로 규정해 놓은 사고의 틀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이건 복음이고, 저건 복음이 아니고, 이건 진리이고, 저건 진리가 아니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것은 죽은 말이고, 권력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이라고 할 때, 이 조사에 해당하는 ‘적’이라는 말이 복음의 제한적 의미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복음이 지향하는 삶, 그것이 바로 복음적 삶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명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 삶이라는 지향성과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기준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곧 복음적 삶의 태도와 지향성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복음적 삶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가치에 절대적인 기준을 부여하는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돈, 권력, 학벌, 외모, 심지어 젊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에 질문을 제기하고, 복음적 의미에 비추어 그 참됨의 의미를 되물으며 사는 삶이 ‘복음적’ 삶의 태도입니다.


이 복음적 삶의 태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절실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주는 풍요 이외에 다른 풍요로움을 상상할 수 없도록 이를 제도화한다는 점에서 우상 숭배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재물(資)을 근본(本)으로 하는 이 제도 하에서 인간이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근본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부자이면서도 자기의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부자 되기를 바라고, 부자 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 속에서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근본으로 여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를 의식하며,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저항적 의지를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회심을 통해 돌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근본자리, 곧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되어야 할 자리는 바로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의지하는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 밭에서 거둔 모든 곡식이 하느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이웃과 고통당하는 세계와 더불어 이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있어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심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본래 머물러야 할 자리로부터 멀어졌다는 깨달음과 인정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문제가 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 한계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몸속에 수분이 부족한데,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몸 속 세포들이 병들고 있는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장 무서운 병은 고통 없이 자라다 일순간에 생명을 앗아가는 질병입니다. 이처럼 만약 우리가 참된 신앙의 자리로부터 멀어져 있음에도, 아무런 심적인 부담감도 없이 그저 평안하고 기쁘기만 하다면, 그것은 축복입니까 재앙입니까?


신앙생활에는 물론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자기기만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잘못이 있음에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마냥 기쁘고 평안하기만 한 것은 참된 신앙도, 성경이 말하는 기쁨도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죄를 인정하며,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돌이켜 회개하는데서 오는 화해의 기쁨입니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어려운 다짐 끝에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가 면회를 하는데, 살인범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사해 주셔서 얼마나 기쁘고 평안한지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여주인공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체험을 합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죄를 누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용서의 고통도, 용서받는 것의 아픔도 체험하지 못한 저 사람의 기쁨과 평안이 참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영화는 이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회개가 영혼의 치료라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 영혼의 질병을 더욱 깊게 하는 마취제입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른지 모르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온지 모르는 이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요약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포로 인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갈등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이미 복음적인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지배체제에 복속된 이들―이 자신들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신앙을 들춰내며 부끄럽게 만드는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달가워 할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회개한 바대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큰 결단과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입으로 회개한다고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고백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매번 시작(고백)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직 성숙한 신앙은 아닙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여, 한 걸음씩 고백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 완성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순례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갑 없이 죄사함을 받은 존재인 우리는 이제부터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순례의 길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첫 걸음인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새 삶을 다짐한다고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피하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과정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변화하게 하시는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회심은 영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때와 하느님의 때가 일치하는 사건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을 아시지요. 병아리가 나올 때가 되어 알 속에서 껍질을 톡톡 두드리면, 어미가 밖에서 동시에 탁탁 쳐서 새끼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알 속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이 신비롭습니다.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알을 낳은 어미가 먼저 알을 품어야 하고, 성숙하여 때가 이르러야 하며, 결정적인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언제나 넓은 품으로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맺도록 사랑과 자비, 인내와 성실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알을 낳은 어미가 그 알을 사랑으로 품지 않으면 생명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낳고, 품어야만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낳으시고 그 품에 품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나은 이들,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이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야 그들 안에 생명이 싹트고 자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이 따르지 않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고를 기꺼이 할 수 있다면, 다음은 때가 이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 나올 때가 되지 않은 달걀을 밖에서 치면 깨져 버리고 맙니다.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기꺼이 수고를 감당한다 하더라도 때가 이르지 않으면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결실을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성급한 마음으로 생명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때를 겸손함으로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 때를 스스로의 노력과 열심히 정하겠다는 교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심고 가꾸는 일일 뿐,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탄생하려면 각각에 알맞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낳고 품는 수고를 다했으면, 하느님께서 생명을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때가 차서 어미 닭이 부리로 껍질을 쪼아 주어야 합니다. 알을 낳고, 품고, 인내하며 기다린 어미닭은 마침내 껍질을 쪼아 생명의 탄생을 완성합니다. 작은 병아리 한 마리가 태어나는 일에도 생명의 조화로움과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생명에 깃드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속에서 나오려는 힘과 밖에서 쪼는 일이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이 탄생합니다.


우리가 만약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를 품어주시고, 우리를 인내와 성실로 기다려주신 끝에, 우리의 때가 이르러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아직 회심의 때가 이르지 않은 이들을 향해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나의 회심이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사랑 가운데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그들의 회심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4.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을 체험한 이후 그는 영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었습니다. 향기를 풍기는 물건 주위로는 그 향기에 매혹된 것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회심을 체험한 웨슬리의 주위에는 참된 회심과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변화를 갈망하며 웨슬리 주위로 모여든 이들 역시 이 변화를 체험하였고, 개인은 물론 영국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감리교회 운동은 초창기부터 개인의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구원의 완성을 향한 동시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돌봄과 섬김을 중요시 했습니다. 변화된 감리교도들은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며, 외로운 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개인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이웃과 세계의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갈망하는 회심도 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라, 나의 참된 변화가 또 다른 이의 변화를 낳고, 이로써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먼저 품는 수고를 해야 하고, 성숙하기를 기다려야 하며, 하느님의 때가 이르러야하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를 만나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며 변화시켜 주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도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각 사람이 하느님 앞에 참되게 회개함으로 생명 없는 세상에 생명을, 평화 없는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복음의 일꾼들로 세워지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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