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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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종교개혁

 

본문: 시편 34:1-8; 갈라디아서 2:15-21

신반포감리교회 홍정호 목사 (2015.10.2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깊어가는 가을 아침에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2년 앞둔 49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1031, 젊은 사제이자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부패한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며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데서 시작한 독일의 종교개혁이 이제 50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1.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을 보는 시각을 달리합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부패한 교회와 교황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한 저항운동의 시작이었지만,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인이라는 입장을 떠나서 역사를 생각할 때 종교개혁을 보는 가톨릭교회의 해석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개혁은 개신교의 전유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생각할 때 가톨릭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개신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여러분과 저와 같은 개신교인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탄압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15세기부터 이른바 가톨릭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을 통해 교회 내부의 모순과 부패를 해결하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에 나섰습니다. 16세기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설립과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는 가톨릭교회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위한 노력에 매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기는 데 있어서 우리는 중세 가톨릭교회는 타락했고, 개신교는 개혁을 추구했다는 이분법적 역사인식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에 루터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어떤 이들은 루터의 개혁을 두고 교황과 국왕으로부터 도망쳐 귀족의 품에 안긴 일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다소 과한 표현이긴 하지만, 일리는 있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루터의 개혁은 교황과 황제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제3의 세력, 즉 귀족 영주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시도였습니다. 루터는 일찌감치 화형에 처해졌겠죠. 루터를 지지한 귀족들의 관심은 황제와 교황이 양분하고 있는 교회 재산의 세속화에 있었습니다. 루터를 지지한 영주들은 이슬람세력의 팽창으로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절대 권력이 약화되고,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의 권위가 추락한 틈을 타 황제와 교황의 권위 모두에 도전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루터의 돌발적인 행동은 이러한 귀족 영주들의 숨은 의도에 그럴 듯한 명분이 되어 준 셈입니다. 이 점에서 루터의 개혁은, 역사상 모든 개혁이 그러하듯,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직접적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종교전쟁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로 양분된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자기이익을 취하려는 세력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바로 종교개혁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말하자면, 중세시대처럼 교황과 황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주들까지 나서 이 싸움판에 끼어들고, 서로 세력다툼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은 유럽의 근대를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관용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대학의 벤자민 카플란(Benjamin J. Kaplan) 교수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뒤이은 그 시대는 많은 측면에서 억압의 시대요 종교 박해의 시대이다라고 기술하는 이유입니다.(카플란, 2015: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의 갈등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촉발시킨 갈등으로 인해, 특히 그가 중세의 유일한 성서였던 <불가타>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에 따른 여파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서로 충돌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해석을 향한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교황과 황제의 절대적 권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이제 민초들은 사제가 읽어주는 라틴어 성서가 아니라, 독일어를 직접 읽고, 독일어로 된 성경을 들으면서 본문의 의미를 직접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권위를 갖고 해석하던 성서를 이제 열 사람, 백 사람이 각기 다른 해석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이렇게 많은 교파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겠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그 시작에서부터, 하나의, 올바른, 원래의 해석을 거부한 집단이었습니다. 다양한 해석들이 경합을 벌이는 해석적 축제의 자리, 그것이 우리 개신교 신앙의 본래 자리입니다. 개신교는 통합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통합이 된다면, 그것은 이름뿐인 통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이미 개신교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양성과 끊임없이 분화하는 차이, 그것이야말로 좋든 싫든 개신교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톨릭교회의 조직력이 은근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혼탁한 시대에, 모두가 제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가 옳다고 목소리 높이는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교황으로부터 사제로 이어지는 위계적 권위, 이른바 교도권을 기본적으로 긍정하는 토대에서 수행되는 종교적 실천이 만인이 사제라고 주장하면서 너나없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개신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실제로 지난 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셨을 때 국민들이 가톨릭교회에 보인 호감이 이런 사실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교황과 사제의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쇄신과 정화의 노력을 지속해 오고 있고, 여성사제 안수문제, 평신도의 역할 등에 대한 입장을 계속 발전적으로 변화시켜 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민주주의적인 경합을 벌이는 것은 다소 불편하긴 해도, 결코 뒤로 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얻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우리 개신교인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계승해야 할까요? 마르틴 루터의 위대함입니까? 웨슬리의 종교적 열심입니까? 아닙니다. “개혁은 언제나 오늘의 개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결코 과거의 일일 수 없습니다. “가톨릭은 부패했고, 개신교는 개혁했다는 이분법적 역사인식에 안주한 채 오늘의 교회개혁을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나서지 못하면, 그렇게 하는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하는 일을 통해서라도 개혁의 정신에 지속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에만도 개신교와 관련된 소식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내 최대교인수를 자랑하는 한 교단에서는 목사끼리 칼부림이 나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중태에 빠졌습니다. 무려 28센티미터의 회칼을 들고 동료목사를 죽이려고 찾아간 그 목사는 그 교단의 전 총무였습니다. 상대목사가 자신을 음해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또한 국내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당회 소수 장로들만 알고 있는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3차까지 공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국내 문제만이 아닙니다. ‘싱가포르의 조용기라 불리며 아시아 기독교 부흥의 사례로 주목받던,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시티 하베스트교회의 콩희 목사가 교회 건축헌금으로 모은 돈 약 400억을 횡령했다는 소식이 지난 주 전해졌습니다. 이른바 문화 선교를 위해 가수인 아내가 미국에 진출하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사 칼부림’, ‘목사 성추행’, ‘목사 성범죄’, ‘목사 경찰감금’, ‘목사 월급등 제가 설교를 위해 포탈에 목사라는 키워드를 입력하자 자동완성으로 따라붙은 검색어들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이것이 오늘 종교개혁 500년을 몇 년 앞둔 우리의 현실입니다.

 

늙고 병약해진 기독교, 한때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이었으나, 지금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있어 보수일색이 되어가고 있는 기독교에 많은 젊은이들은 냉소와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의 쾌유를 빌며 광장에서 한복입고 부채춤을 추고, 동성애 반대를 외치며 발레를 하는그것도 동성애자인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춰!개신교인들을 우리시대 사람들은 외계인을 쳐다보듯 합니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종교, 비참에 처한 이들의 슬픔에 공명하지 못한 채 모든 문제를 정치적, 신학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환원해 버리는 데 익숙한 종교에 단언컨대 미래는 없습니다. 새 시대 새로운 교회는 거창한 주장이나, 이 자리에서 서서 저처럼 설교하는 사람을 통해 도래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희망이고, 기독교에 희망이 있으려면 저를 포함한 신자들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떻게 새로워져야 할까요? 간단히 그 말씀을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4.

 

오늘 갈라디아서의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216절의 말씀은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아무리 쌓아 올려도 결코 하느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분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칼 바르트, 본 훼퍼 등 1세기로부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신학의 가장 굵직한 해석의 줄기, 칭의론입니다.

 

루터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로부터 중세 가톨릭교회의 정통교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고, 오늘날에도 계속 재해석되고 있는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칭의론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대에 와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구원은 값싼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흉악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보혈의 피로 구원받아 마음이 평안하다는 식의 괴설이 신앙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참고해야 할 중요한 해석이 최근 등장했습니다. 신약학자인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가 중심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Jesus Christ)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Jesus Christ)이냐에 관한 논쟁입니다. 사실 최근의 논쟁은 아닙니다. 헤이스가 1983년 발표한 학위논문 단행본에서 본격화된 논쟁이고,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논쟁을 본격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약학 전공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헤이스는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πίστεως ησοΧριστο를 영어로 faith in Jesus Christ로 번역한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른 성경과 달리, KJV는 이 구절을 faith of Jesus Christ로 번역하고 있는데, 문맥상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논증을, 헤이스는 길게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πίστεως ησοΧριστο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 아니면 예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울로부터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전통신학의 해석의 계보를 충실히 계승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 예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도 예수처럼, 우리도 예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서야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해석이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구원을 위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본받아야 할 분으로 여기는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헤이스를 위시한 학자들의 해석은 국내 강단에 좀처럼 소개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Jesus Christ)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한국 개신교의 타락이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이렇게 믿는 자들이 많은데, 왜 교회는 이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의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교회가 부패와 타락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음과 예수의 믿음은 바울에게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헤이스도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의 믿음을 따르는 것은 본디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색깔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믿음에 동참함으로 하느님이 뻗고 계시는 구원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인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5.

 

오늘의 종교개혁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믿음, 예수의 꿈, 예수의 길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종교개혁의 내용이 되어야합니다. 어떤 이는 그러더군요. “여러분,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이번 생은 그냥 망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 믿으면서 이 세상에서 당장에 어떤 결실을 맺을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옳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말은, 그냥 낭만적인 말이 아닙니다. 당장에 고통과 손해가 뒤따르는 일입니다. 진정한 교회가 언제나 소수의 무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그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을 원하나? 나는 정말로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인가? 나는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지금 내밀고 있는 손을 뜨겁게 맞잡고 있는가?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우리는 이 어려운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웁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이 내민 손 맞잡고 구원의 길에 힘찬 발걸음으로 나서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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