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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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알맞은 열매

 

본문: 스바냐 3:14-20; 누가복음 3:7-18

신반포감리교회 홍정호 목사 (2015.12.13. 대림절 제3)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따.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대림절이 되면 저는 우리가 사이에 놓인 존재(being-in-betweenness)’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미 오신 주님과 장차 오실 주님 사이의 시간, 이미 현실이 된 오늘과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내일 사이의 시간에 우리는 너나없이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와 관계가 좋을 때 우리는 사이좋다라는 말을 씁니다. 사이가 좋다는 것은 타자()와의 거리가 적절히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사이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을 때, 그 때가 사이좋을 때입니다. 여러분, 누구랑 다투시나요? 길 가는 사람 아무하고나 싸우지는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과 싸우죠. 매일 만나는 사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들입니다. 사이 조절이 잘 안 돼서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이(타자)가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이미 현실이 된 오늘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딱 붙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있다는 걸 좀처럼 긍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이 사이에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 이미 알고 있음과 아직 모르고 있음 사이, 이미 가지고 있음과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음 사이가 희망이 놓인 장소입니다.

 

사이가 좋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만 유효한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딱 붙어있어도 안 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불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무화(無化)를 체험하는 신적 합일의 신비주의 전통도 있지만, 글쎄요, 저는 타자로서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언제나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야말로 이미알지만, ‘아직은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긴장이 필요합니다. 이 불편한 긴장관계를 단번에 해소해 버린 이들은 뜨거운 광신자가 되거나, 차가운 무신론자가 되어버립니다. 신앙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현실 정치나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신앙이란, ‘이미아직사이의 불편하고 애매모호한 관계성을 버티면서, 끝까지 최종결론을 유보하려는 끈질긴 태도(attitude)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향성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이렇다라고, ‘저 사람은 이렇다. 이것은 그런 것이다하는 최종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사이의 좋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이를 없애고, 상대방을 말이나 행동으로 포획하려고 할 때, 그 관계는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 불화하는 관계가 될 뿐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과 장차 오실 주님 사이의 시간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사이좋음을 추구하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2.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을 읽어서 알지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사이좋음보다는 적대적인 관계를 초래하는 듯 보입니다. 당장에,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하고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탄절 세례 받으실 분은 신청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신청자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이렇게 말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어요? 제정신 아니구나, 생각하시겠죠? 회개하라고 한 게 누구입니까? 요한 아니었습니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것이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증거로 세례를 받으러 온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니,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그 무리에 속해 있었더라도, 엄청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좋음을 추구하면서, 적대를 활용한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적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적대를 통해 진정한 사이좋음을 추구하는 관계로 나아간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10:34)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이후에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10:35) 이게 무슨 벼락같은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가정 파탄자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얼마 전 경남 거창고등학교 채플에 설교초청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인데, 전국에서 실력 있는 아이들이 모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함께 지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학교가 유명해진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직업선택의 십계명 때문입니다. 아마 들어보신 적이 있을 텐데, 넓은 강당 맨 뒤에 다음과 같은 직업선택의 십계가 걸려 있습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것이 빛과 소금이라는 기독교정신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거창고의 직업선택의 십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고 가르치고,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이런 적대의 정신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적대를 활용하여 틀어진 관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사이 회복에 나서는 것, 그것이 요한과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사이좋음은 적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옵니다. 당장에 불편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면,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다수의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자기 삶의 길을 돌이킨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오히려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기 양심을 찌르는 말을 계속 듣고 있느니, 차라리 귀를 닫아버리거나, 아예 희생양으로 삼아 제거해 버리는 게 속 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끔 어떤 분의 설교를 듣다가, 중간에 혼자 화가 나서 꺼버릴 때가 있습니다. 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져야 할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뭘 어쩌라는 말씀인가, 내가 또 뭘 희생해야 하는데,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죽인 이들처럼 저분을 음해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 시대에 설교를 통해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돌이키게 만드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라기는, 저도 누가 듣다가 꺼버리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면 좋겠습니다.


3.

 

요한과 예수님이 사이의 회복을 위해 적대를 활용했다고 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버리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 분이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수녀님이 다 큰 아이 등짝을 때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수녀님의 행동에 방문객인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통 손님이 오면 같이 사진 찍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수녀님은 손님이 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 등짝을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수녀님이야말로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아이를 대하지 않고, 자기 명성에 흠집이 가는 것 따위는 생각도 안 하면서, 그 아이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라 출처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제게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보이기 위한 건 사랑이 아닙니다. 요한이나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달리,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하고 꾸짖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는 삶이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하는 자기 만족감에 빠져 사는 삶이 아니라는 말씀을 요한은 전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한 요한의 가르침은 오늘 어떻게 번역해 볼 수 있을까요? 너희는 속으로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할 수 있다이렇게 말하는 정도의 파격이 아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고백만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자부심만으로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떠해야 합니까?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11)여야 합니다.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13)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14)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은 삶의 소소한 실천들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라는 게, 요한의 요지입니다.

 

4.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요한의 선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를 우리는 좋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나와 하느님, 나와 이웃이 어떻게 하면 사이좋은 관계로 만들지를 고민하며 살라고 부름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나요?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그리고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임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예수 오심의 의미를 교리에 가둘 수 없습니다. 전통에 가둘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오심을 가능하게 만드는 나눔과 섬김의 실천만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대림절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임재를 바라며, 이웃을 향하여, 특별히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손을 펼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