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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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식탁

 

본    문: 시편 81:10-16; 누가복음 14:7-14

설교자: 홍정호 목사 (2016.8.28. 성령강림 후 제15, 왕국절 시작)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엊그제 밤비가 내린 후 아침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열대야가 길어서인지 교회로 오는 길에 맞는 아침 바람이 반갑기도 하고 낯설게도 느껴집니다. 이제 한 여름 무더위가 지났으니, 9월부터는 다시금 신앙에 활력을 더해야 하겠지요? 마침 오늘은 교회력으로 왕국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왕국절은 왕 되시는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하며,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책임들에 더욱 힘쓰는 절기입니다. 우리교회 주보에는 왕국절기를 별도로 표기하지는 않습니다만, 8월 마지막 주일부터 대림절 전 주일까지, 성령강림절 후반 13-14주일은 왕국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이 특별히 강조되는 절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대림절 전까지 작은 사회적 실천들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김형수 시인이 쓴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책에 풀과 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봄에 싹이 돋을 때 풀과 나무의 떡잎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오뉴월만 되어도 벌써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나무를 덮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불면 풀은 말라버리기 시작하고, 겨울이 오면 완전히 사그라져서 이듬해 봄이면 풀은 다시 무의 상태에서 떡잎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매년 이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나무는 다릅니다. 풀보다 성장이 훨씬 더디지만, 나무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도 움츠러들기는 할지언정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무는 성장의 흔적을 나이테에 간직한 채 이듬해 봄이 되면 전년도에 성장한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웁니다. 그래서 풀은 수십 년이 지나도 숲이 되지 못하지만, 나무는 숲이 됩니다. 김형수 시인은 문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풀의 길을 가는 자는 소멸할 것이고 나무의 길을 가는 자들이 숲을 이룬다고 말합니다(김형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아시아, 2014, 34-35).

 

신앙의 길은 어떨까요? 하루하루 우리 영혼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도 그저 가던 길 묵묵히 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신앙의 길이 때로 쳇바퀴 도는 것처럼 무료하고 무의미한 일의 반복이라고 생각되실지라도, 우리의 정신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데 있어서 매주일 믿음 안에서 보내는 이 시간들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긍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밤새 훌쩍 크는 풀처럼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되어 참 반갑고 좋습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절부터 11절까지는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상석에 앉으려는 세간의 경향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며, 12절부터 14절까지는 초대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초대 대상을 선정하는 데 신중을 기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잔치가 되도록 하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느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어떻게 하면 윗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서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일전에도 주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23:2)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23:5)이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잔치에서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23:6)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과 비슷한 교훈 하나를 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23:11-12) 누가와 마태에 나오는 이 말씀은 단순히 처세술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이는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지만, 자기를 높이는 이는 하느님께서 낮추실 것이라는 신앙의 진리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모두 그들을 초대한 바리새파 지도자와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함께 그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초대한 이에게 영광이 되는, 그야말로 자리를 빛내줄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초대를 받았지만, 언젠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집주인 역시 언젠가 자연스럽게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잔치를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중요합니다. 어디 가서 지위에 걸 맞는 대우를 받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최소한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를 주면 두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하나나 그 절반은 돌려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기는 법, 승리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삶에 대해서는 자주 듣지만, 잘 지는 법, 적절할 때 물러서고, 내려놓고, 올라간 데서 내려올 줄 아는 지혜와 용기는 좀처럼 배우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적 질서에 속한 삶, 세속의 관성에 이끌리는 삶과 신앙의 길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자기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너무 쉽게 화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상식으로 자리 잡은 질서를 가로지르고 뒤집으면서, 새롭게 열리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때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시가 되고 걸림돌처럼 여겨지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초대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초대해서, 그들로 그 잔치의 일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높은 데 앉으려고 서로 눈치 보지 말고, 낮은 자리를 찾아 가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초대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낮은 데로 가야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보이고, 그들이 보여야 그들을 잔치에 초대할 생각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낮아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낮아지면 결국 높여주실 테니까, 겸손을 출세의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처세술에 관한 교훈이 아니라, 낮아짐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신앙의 진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처럼 자기를 향한 삶으로부터 돌이켜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을 지향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거나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으셨지만, 감출 수 없는 등불처럼 그 존재가 사람들 앞에 환히 드러나는 삶, 빛이 되어 타인의 앞길을 비추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어둠이 머물 수 없는 빛이셨습니다. 자기를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서 가신 이 길을 따라 가려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실패의 반복입니다. 넘어질 게 뻔히 보이기 때문에 차라리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제자리걸음만 계속할 뿐입니다.

 

3.

 

재작년 예배시간을 오전으로 변경한 이후 매주일 다 같이 교회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저는 이계준 목사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교회의 친교가 지향해 온 공동식사의 신학적 의미는 개방된 식탁을 나누는 데 있다고 봅니다. 모두에게 개방된 식탁, 그래서 비록 소박하지만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식탁을 지향해 온 것이 우리교회가 그동안 지향해 온 성서적 친교의 정신이라고 믿습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함께 소박한 식사를 나누는 건 모두에게 개방된 식탁이라는 성경적인 친교의 정신을 더욱 적절히 구현하기 위한 제 나름의 목회적 지향을 바탕에 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식탁은 누구에게나 열린 식탁이었습니다. 그분의 식탁에는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제외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한 자리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시면서 그들과 진실한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식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련해야 하는 식탁의 모범입니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이렇게 모두에게 개방된 식탁을 집 안에 마련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누가 이웃인지 강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무조건 환대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식탁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각자의 가정에서 실천하기 힘든 누구에게나 열린 식탁이라는 예수님의 환대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입니다. 교회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무조건적 환대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특히 여선교회 여러분들이 지금껏 2년이 넘도록 매주일 교인들을 위해 순번을 정해 점심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시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식사당번을 맡으신다는 것은 단지 교우들을 위한 점심준비에 나의 땀과 물질을 사용한다는 의미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교회의 식탁을 준비하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환대의 식탁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식탁은 개방된 식탁입니다. 교회 점심식사 시간에 누구는 오고 누구는 오지 말라고 할 수 있나요? 당신은 의롭게 살고 있으니 오고, 당신은 죄인이니 저리 가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식탁그것이 예수님의 환대에 참여하는 교회의 식탁입니다.

 

그러니 가정에 당번이 돌아왔을 때 부담이 되시더라도 예수님의 환대의 식탁을 마련한다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준비하십시오. 교인들에게 대접한다는 기쁨도 있겠지만, 그것이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주님의 환대의 식탁을 마련한다는 믿음으로 정성을 다해 이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수고가 하느님 앞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립니다. 환대의 식탁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감사함으로 거기에 참여할 때 하느님께서 그 수고를 기쁘게 보시고,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을 따로 불러 모아 대접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식탁, 그래서 고마움을 갚을 길 없는 그 환대의 자리로 여러분이 이웃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4.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느님의 식탁이 누구에게나 열린 환대의 식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초청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느님의 식탁이 단 몇 사람의 의인만을 위해 마련된 식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당연히 초대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이 당신의 나라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다른 이들을 제쳐두고 단 몇 사람만을 부르시는 그 자리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셔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닙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고난과 헌신의 삶을 저울로 재듯 하시는 분이라면, 저 보다 앞서 초청받아 마땅한 이들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여러 분 떠오릅니다. 그런데 간혹 신앙이 좋다는 신자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정말 의의로, ‘하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응답하지 않으신 기도가 하나도 없고, 자다가 꿈으로도 보여주시고, 응답으로도 들려주시니 그 자리에 자기가 아니면 누가 가겠느냐는 식입니다. 오히려 제게 따가운 눈총을 보냅니다. 목사가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회를 하느냐는 식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된 건 순전히 초대해 주신 분의 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식탁이 누구에게나 열린 환대의 식탁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그 자리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잔치에 가서 먼저 윗자리에 앉는다는 게 우습지 않습니까? 오히려 세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잔치, 특별히 자기는 초청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그 잔치의 기쁨을 아는 이들, 자기가 주님의 환대로 인해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부유한 이웃들을 잔치에서 제외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배제에 초점이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유한 이들은 너희가 굳이 초청하지 않아도 남들이 다 알아서 잔치에 모실 테니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잔치를 마련하는 너희들이 신경 써야 할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잔치를 준비하는 이들이 앞서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도 부르지 않을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초청함으로 너희들이 마련하는 식탁이 하느님 나라의 식탁을 닮도록 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만이 아닙니다. 정서적으로 빈곤한 이들, 그래서 일쑤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곤 하는 이들까지, 아니 그들을 먼저 식탁으로 환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체적으로 눈먼 이들만이 아닙니다. 남들 앞에 내세울 만큼 교육받지 못한 이들,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이들을 앞서 그 자리에 초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는 그 일을 하라고 부름 받은 공동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대의 식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누구나 와서 함께 앉을 수 있는 식탁이 교회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출신지역, 이데올로기, 학력, 직업 따위가 걸림돌이 되거나 환대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사기꾼이나 강도 같은 이들도 있겠지요. 포도원을 망치려는 여우들도 올 겁니다. 그래도 환대의 식탁을 닫아두는 순간,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잔치의 자리, 그 잔치에 참여해서 삶이 변화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저와 여러분 삶이 모두에게 열린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또 정성으로 그 식탁을 마련함으로 누군가를 조건 없이 맞아들이는 환대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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