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256 댓글 0

확신의 끝, 자비의 시작

 

본문: 시편 65:1-8; 누가복음 18:9-14

설교: 홍정호 목사 (2016.10.23. 성령 강림 후 제23)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교회력이 정한 오늘의 본문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특별히 이 본문은 주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명료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죄인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교훈으로 끝맺음됩니다. 이 말씀은 복음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격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미움을 사지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지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렇듯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처세술에 관한 교훈보다 더 깊은 복음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

 

이 비유에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을, 세리는 율법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세속적이고 불의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해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있었던 이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인 자에 불과하고,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기 때문에 이 비유의 결론이 가져오는 충격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신 위선적인 종교인의 상징이고, 세리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겸손한 죄인이라는 전제가 이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부정적인 반응들은 유대교 공동체와 초대교회와의 갈등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복음서의 비판적 시선은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겪은 유대교 기득권층과의 갈등이 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보는 인식은 유대교와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초대교회의 일종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상을 기준으로 바라 본 상대적 시각을 반영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들을 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개혁자들의 주장 속에서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한낱 자기 의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었고, 그들에 대한 종래의 부정적 인식은 증폭되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랑할 자기 의가 없는 죄인, 아무 공로 없이 오직 은총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얻은 인물의 전형이 됨으로써 은연중 동정과 연민의 대상, 나아가 기독교인의 자기 동일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런 편견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각과는 분명 대조적입니다.

 

2.

 

본문에 나오는 세리(telones)’19장에 나오는 세리장(architelones)’ 삭개오와 다릅니다. 이 세리는 삭개오와 같이 막강한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그 밑에 고용되어 일하던, 먹고 살기 위해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에 종사하던 종류의 사람입니다. 로마의 세금에는 토지세, 인두세, 통행세와 관세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토지세와 인두세는 당시의 행정관들이 산헤드린에 의탁해서 징수했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적었습니다. 문제는 관세와 통행세였습니다. 로마는 입찰을 통해 최고액수를 제시하는 세리장들에게 관할지역의 관세와 통행료 징수권을 팔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는 매년 안정적인 통행료와 관세를 거둬들일 수 있었고, 이를 제국의 안정과 확장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에 2.5%라는 법적인 관세율이 있었다지만, 물건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세리의 자율권에 속했습니다. 당연히 세리장들은 폭력과 횡포에 능한 세리들을 고용해서 장사꾼들에게 보다 많은 관세와 통행료를 받아냈습니다. 길가에서 사람들을 세워 비싼 통행료를 받던 세리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강도행위에 다름없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리를 강도취급 했습니다. 로마의 지식인들은 세리들을 매춘굴의 포주와 같은 존재로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서 역시 그들을 창녀와 동급의 범죄자로 여깁니다. 심지어 랍비들은 세리들이 들어간 집은 모두 부정하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이민규,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 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 종교적 착취와 경제적 착취자의 기도,” <신약논단>, 10, 4, 922-923) 세리는 로마제국의 착취를 대표하는 이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미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경쟁자였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로마를 중심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던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있어서 세리가 식민지에 대한 로마의 착취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바리새인은 종교적 착취의 상징이었습니다. 각종 십일조가 종교세의 명목으로 요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이 소작농이었고 생계유지도 힘들었던 상황에서 로마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중의 세금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미워한 이유는 로마에 많이 바칠수록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헌금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세금은 강제적이었던 반면, 종교적인 세금은 헌금의 성격이 커서 로마에 많이 바칠수록 종교세 납부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세리를 정죄하면서, 아주 경멸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습니다. , 세리와 바리새인 가운데 누가 의롭나요? 식민지배계급의 말단 하수인과 종교지배계급의 존경받는 착취자 가운데 누가 더 의로운가요? 둘 다 아닙니다. 그래도 굳이 경중을 따지라면 저도 예수님처럼 차라리 세리의 편을 들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착취의 추악함이 성스러움 아우라로 은폐되어 있는 반면, 세리는 그 추악한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을 연민의 몫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3.

 

주님이 이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일, 자기 의에 대한 확신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멸시로 종종 이어집니다. 마땅히 그러해야한다는 자기 기준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타인에 대한 관용의 폭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그렇게밖에 못하느냐는 가파른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기 십상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올바름에 대한 기준도 큰 몫을 합니다. 예컨대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교회 교인들이 특별히 경계해야 할 태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교회와 다르다는 인식입니다. 차별성을 긍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불의하고 부패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은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고립과 자폐로 몰아넣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여기에 있는 우리는 세리보다는 바리새파 사람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오시고, 헌금생활과 봉사도 열심히 하시고, 신앙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다 우리는 교회의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도 배격하면서 질적 성장을 추구하고, 대형교회와 그 목회자들의 각종 스캔들에 때로 냉소를 보내고, 무엇보다 성서를 문자주의적으로 읽지 않으면서 삶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나무랄 데 없습니다.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바리새파 사람이 빠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세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가 무얼까요? 의인과 죄인의 차이는 분명 아닙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자기가 옳다는 확신으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빗대어 다른 이를 멸시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가 옳다는 확신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 내면서,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세리의 변화야 말로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4.

 

기적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지금 내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이 사실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서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누구의 도움 없이도 땅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눈 먼 사람이 눈 뜨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본다는 사실에 감격할 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지금 세리에게는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세리가 회개하다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의롭다는 확신에 가득 찼던 이들이 타인을 연민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마음,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접속된 이들입니다. 저마다의 확신에 가득 찬 이들이 그 마음을 겸손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자비를 향해 마음을 열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는 죄인과 의인의 차이가 아니라, 자비를 향해 돌아선 사람과 아직 돌아서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기적의 순간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치곤 합니다. 상황이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변화를 향한 노력을 포기하곤 합니다.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단단히 굳었던 땅을 뚫고 새싹이 나오듯, 완고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그 안에 새 생명이 깃드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당장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기 의를 내세워 섣불리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저 세리와 같은 이들 안에서도 하느님은 새로운 삶의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다는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들어 당신의 나라를 위해 들어 쓰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견고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완고함 앞에서 몸과 마음에 남은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절망감을 경험하게 될 때고 있습니다. 그때가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세리가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하느님은 변화할 것 같지 않은 나와 당신 안에 생명의 씨앗을 이미 심어 놓으셨음을 긍정하는 믿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인내하시니 우리도 인내합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니 우리도 기다립니다. 의로운 말, 단죄의 말로는 부족합니다. 살리는 말, 생명을 북돋는 말이 필요합니다. 타인을 향한 멸시의 시선을 거두고, 사랑과 연민의 시선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게 될 때 세리에게 일어난 기적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