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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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되신 예수님

 

본문: 시편 98:1-9; 요한복음 15:9-17

설교: 홍정호 목사 (2018.5.6. 부활절 제6, 어린이주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어린이주일입니다.

 

1.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에 나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15:5)하는 비유의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이니, 우리가 그분에게 잘 연결되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열매 맺음의 원리라고 할까요, 예수님에게 잘 붙어 있고, 그분과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원리라고 해서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삶, 사랑이 흐르는 삶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포도나무이신 주님을 통하여, 가지인 우리에게까지 미쳐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주님께서 머무셨기에, 주님 안에 우리가 머물면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농부의 손에서부터 포도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거쳐 가지인 우리의 삶에서 그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분에게 잘 붙어 있어라, 잘 붙어 있으면서 사랑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삶을 잘 살아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참 쉬운 말씀이지요? 불교경전에 밝은 어느 원로 불교학자께서 언젠가 그러시더군요. 기독교인들은 좋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을 읽어보면 참 쉽고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되어 있어서 좋겠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은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하나같이 다 어렵고 뜻도 제각각이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설교랄 게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쉬운 비유의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배움이 없는 이들도 다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쉬운 말씀을 쉽게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살던 이들이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오늘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처럼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쉽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해서 모릅니다. 그 시간과 장소의 간극을 무시한 채 성경을 읽으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상태의 무지가 일평생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쉽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나는 참이라는) 잡설들도 많고, 잡설과 참말 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서, 말만 가지고는 그 말의 진위여부나 실행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벌어지는 말의 풍경입니다. 그래서 쉬운 예수님의 말씀이 실은 훨씬 더 어렵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

 

사랑하라는 말이 어려운 말인가요? 하나도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생각할 때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랑은 이것이다, 하는 자기 생각이 굳어져버리면, 그밖에 다른 말이나 행동은 사랑으로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교정을 요구하게 되고, 상대를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계몽’(enlightenment)이라고 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깨치는 빛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 계몽이고, 이 빛을 전해 다른 이의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또한 계몽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계몽이 아닙니다. 사랑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지난 주 어느 신학포럼에서 발표를 했는데, 우연히도, 오늘 본문의 말씀과 주제가 같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웃과 세계에 전하는 미션(mission)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베풀 ’() 자에 가르칠 ’() 자를 써서, ‘선교’(宣敎)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이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가르침을 베푸는 건 계몽이지 선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가르쳐 주는 이의 우월한 지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누가 누구에게 뭘 가르치는 계몽이 전부인 시대가 아닙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교회를 선생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심지어 신자들조차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목사를 자기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베풀 에 가르칠 쓰지 말고, 먼저 ’()에 사귈 ()’를 씁시다, 그랬습니다. 남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계몽주의적 실천이 선교가 아니라, 이웃과 앞선 사귐에 나서는 실천으로 선교’(先交)를 재정의해야 한다는 겁니다. 선교라는 낱말을 계속 사용하되, 그 의미를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표의 부제를, “계몽에서 사귐으로라고 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뭘 가르치는 계몽 활동이 아니라, 그들과 먼저 사귀자,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자면, 친구가 되어 주자, 그렇게 말이지요. 사랑은 계몽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선교는 이렇게 친구가 되어 주는 일에 먼저 나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렇게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덕이랄까요, 태도가 무엇이 있을까요?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계몽은 겸손하지 않은 자가 더 잘합니다. 내가 너보다 많이 안다는 확신이 커야, 내가 믿는 것이 네 믿음보다 참되다는 확신의 크기가 큰 만큼 더 잘 할 수 있는 게 계몽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랑은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흔들리는데 나는 굳건히 서 있는 것, 그것은 계몽하는 이의 태도이지, 사랑하는 이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고, 때로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자기를 하나님 손에 내 맡긴 이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여읜 자라야 다른 이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높으신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땅에 오시되, 높은 자리에, 알 만한 사람들 가운데 귀하신 몸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어디 누이실 자리 없어 말구유에 나신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선언, 그것이 복음입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낮은 곳에 임하시어, 나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게까지 높아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까지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공덕을 쌓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에게 이를 때까지 마냥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뜻이 여기에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에 한 번 이르러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몸소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 우리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3.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굳건한 뜻을 져버리신 적이 없었으나, 강요나 억압으로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어 지배하는 전략을 취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상대방의 처지에 맞추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죄인이라 칭함 받는 이들의 언어는 어떻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대체로 거칩니다. 이른바 교양으로 덧입혀진 사람들의 말과 달리 그들의 말은 고통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하고 거친, 그래서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그런 거친 말의 외양을 띱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고통을 호소할 다른 언어가 마땅히 없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시고, 그들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사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이러한 겸손을 날마다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알 만한 훌륭한 인물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반면,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인물과의 거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와 친하고, 또 누구와는 멀다는 것이 곧 의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겸손하지 못한 것이고, 여전히 약한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하시고 크신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곁에 있는 이와 당신의 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이가 곁에 있거나 낮은 이가 곁에 있거나, 부자가 곁에 있거나 가난한 이가 곁에 있거나, 권세 있는 이가 곁에 있거나 비천하다 손가락질 받는 이가 곁에 있거나, 그분에게는 그런 기준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금 마주대하고 있는 이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 사람 가운데에서 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당신의 뜻을 굽히신 적이 없으나, 그 뜻을 펼치시는 데 있어 강요나 억압으로 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겸손으로, 친구가 되는 사귐으로 언어로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15:14-15a)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행하는 이들을 종이 아닌 친구라고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이죠. 지금 사랑하는 이는 주님께 친구라 불릴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로 불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신 주님, 겸손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나님나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어 우리의 가지에도 사랑에도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며,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는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자기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만, 사랑의 본성에 비추어 날마다 우리를 돌아보고, 말과 행실을 교정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계몽이 아닙니다. 사랑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어 함께 흔들리고, 함께 무너지고, 또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높으신 분, 영원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흔들리는 길로 오셨습니다. 친구 되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에 눈 뜨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웃의 친구가 되는 삶으로, 높은 이의 계몽에서 친구의 사귐으로 나아가는 삶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할 때 우리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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