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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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 심은 나무

 

본문: 시편 1:1-6; 요한복음 17:6-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8.5.13. 승천주일 어버이주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 승천주일이며, 감리교회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

 

시편과 요한복음의 말씀이 교회력 본문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배반당하고 잡히시기 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여 내게 주신 사람들”(17:6)이라고 칭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아버지와 나)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11) 둘째, “(당신의)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도록”(13) 셋째,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도록”(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도록”(17)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신 이 네 개의 기도가 곧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할 때, 예수님의 이 네 가지 기도의 내용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우리 신앙생활의 이정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과 함께 제시된 교회력 본문 가운데 오늘 택한 말씀은 시편 1편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 내용의 서시(序詩)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서시란 긴 책머리에 서문 대신 쓴 시를 말합니다. 책에서 서문의 역할이 그렇듯,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내용과 얼개를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참으로 행복한 이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시인의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시편 1편에 관한 여러 번역본을 읽어보았는데, 가톨릭 성경의 번역이 제일 시적(詩的) 정취를 잘 담아낸 것 같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눈을 감고 한 번 들어 보십시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 (가톨릭 성경)

 

어떻습니까, 좀 더 시 같나요? 현대인들이, 특히 근대성이라는 합리적 틀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받고 자란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시 읽기가 아닐까요? 이성복이라는 시인은, “독자가 이해하는 순간, 시는 죽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랍니다.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95) 이해하면 할수록 이해에서 멀어지는 역설이 시의 언어이고, 그래서 시는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쉽습니다.

 

시편은 어떻습니까? 시편은 본래 악기에 맞춰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에는 감사와 찬송의 노래만 있지 않습니다. 곤경에 처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시도 있고,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 복수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시도 있습니다. 시편을 읽는 태도랄까 관점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입장의 동일성입니다. 시편 저자의 입장, 혹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시를 읽지 않으면,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편파적이고 이기심에 가득한 이들의 아우성으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인의 눈높이에서 시편을 읽을 때, 시편은 우리 삶에 위로와 희망, 그리고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생동하는 말씀이 됩니다.

 

2.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의 길에 대해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혜롭고 빠른 길이라고 해서 악을 도모하는 이들과 한편이 되지 않고, 남들이 우르르 다 몰려가는 길이라고 해서 죄인의 길에 합류하지 않으며, 우월적 입장에서 타인에 대한 조소와 냉소를 일삼는 교만한 자의 자리에서 떠나, 말씀의 희망을 일구는 사람,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이런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를 의인과 대비시킵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삶의 든든한 뿌리를 내린 사람, 중심이 바로 선 사람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위기를 겪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때때로 찾아오는 위기를 맞이하며 살아간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위기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자기가 원인이 되어 찾아오는 내적 위기가 있는 반면, 자기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외적 위기도 있습니다. 이렇듯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이겠습니다만,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생명체마다, 각각의 생명체가 처한 특성에 따라 다릅니다. 생태사학자인 강판권 선생은, 나무가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이며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동물과 달리, 한 장소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존재인 나무는 자기 몸을 움직여 위기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는 500년 이상도 한 자리를 지킵니다. 그 긴 세월동안 나무는 심겨진 자리에서 비바람과 강풍을 맞고, 때로 긴 가뭄을 견디기도 하면서,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강판권 선생은, 나무의 삶을 이해하려면 뿌리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뿌리가 땅 속에 있기 때문에 뿌리를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밖으로 나온 주변 나무들을 보면, 그 나무가 얼마나 깊은지, 어디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얼마나 생명력이 지속될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끔 산에 오르다보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 주변에 뿌리를 다 드러낸 나무를 만나곤 합니다. 나무의 입장에서는 땅 속에 잘 있어야 할 뿌리가 바깥으로 나온 것이 큰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자기를 덮어주고 보호해 줄 아무런 장치 없이 사람들의 거친 발길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뿌리가 밖으로 드러나면 나무는 자기 몸을 유지하기 아주 어렵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뿌리가 드러난 나무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 밖으로 뿌리가 나온 나무는 생존을 위해 자기 스스로 방법을 찾는다고 합니다. 동식물학에서는 그것을 자기수용성 감각’(proprioceptive sense)라고 부른답니다. 밖으로 나온 뿌리를 횡으로 감싸는 다른 뿌리를 내서, 땅 위에서나마 균형을 잡기 위해 나무는 안간힘을 쓴다는 것입니다. 산비탈 가파른 곳에 선 나무들이 거센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기수용성 감각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자기 수용성 감각 때문에 나무는 자기의 결핍을 계속 극복하고 균형을 잡으면서, 생장 과정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심겨진 곳을 자기가 고를 수는 없지만, 심겨진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잎은 하늘을 향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나무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모습 중 하나라고, 강판권 선생은 말합니다. (강판권, <나무철학>, 글항아리, 2015, 331-338)

 

3.

 

성서의 세계에서 잎이 푸르고 열매 맺는 나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삶을 상징하는 반면, 마르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곤 합니다. 시편 1편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은유가 나옵니다.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 복 있는 그 사람은, 황량한 광야에 심겨진 나무, 뿌리가 땅 밖으로 다 드러나 생존에 위협을 받는 위태로운 상태의 나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무는 어디에 심겨도 다 제 몫의 삶을 살아냅니다. 좋은 땅에 심기면 좋은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만,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땅도 바뀌기 마련이지요. 심겼을 때 좋은 땅이라고, 끝까지 좋은 땅으로 남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은유는, 좋은 환경, 풍요로운 배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외적 조건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은유가 아닐까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란, 어디에서든 생명의 순환과정을 지속하는 나무라는 의미입니다. 심겨진 곳에 광야이든, 산비탈이든, 아니면 정말로 시냇가이든, 심겨진 그곳에서 생명의 순환을 지속하는 나무와 같은 삶,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나무의 순환과정이란 뿌리로부터 양분을 얻어 줄기와 가지와 잎으로 보내고, 다시 잎으로부터 가지와 줄기를 거쳐 뿌리에까지 이르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에서 다시 내적인 것으로의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나무는 생을 지속하고, 심겨진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거친 비바람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는 동물과 달리 나무로서는 위기를 피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나무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 모든 것을 자기가 받아 안으면서, 생명의 순환과정에 충실한 것입니다. 자기수용성 감각이라는 것을 동원해 가면서, 바깥 환경을 탓하지 않고,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생활하고, 생활을 통해 말씀의 깊이를 더해하는 신실한 이들의 삶과 닮았습니다.

 

시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이가 복 있는 이요, 의인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런 이는 철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반면, 악인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옥토만 찾아다니는 이들은 충실함과 인내로 무르익는 자기수용성 감각을 키울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관리 능력을 키우지 못한 존재는 옥토에서도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은 존재로 살 뿐입니다.

 

4.

 

부활절 마지막 주 승천주일이자 어버이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어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걸어가신 길은 결코 옥토가 아니었지만, 그분은 당신을 만난 이들과 더불어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는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시들지 않는 삶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자리가 어디든 우리는 자기의 자리를 시냇가로 여기는 나무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려 광야에서든 옥토에서든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남들 보기에 옥토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시냇가요, 우리가 뿌리내려 열매 맺을 삶의 자리인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복 있는 사람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살아가길 다짐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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