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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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이 오시면

 

본문: 사도행전 2:1-13; 요한복음 15:26-16:15

설교: 홍정호 목사 (2018.5.20. 성령강림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할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에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과 사순절, 부활절과 승천주일을 지나 이제 성령강림절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구유에 나신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오른편(1:20)에 앉으셨습니다. 떠나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15:27)

 

성령의 존재에 관한 논의는 신학의 오랜 물음입니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 왔느냐, 아니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면서 동서방교회 분열에 명분을 제공한 고전적인 필리오케(filioque)’ 논쟁에서부터, 오늘날 은사주의와 신비체험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오순절파교회의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에 이르기까지, 성령 이해의 상이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회의 각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대한 강조는 제도로 경직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상이 되어버린 신앙생활에 영적인 감각을 환기시키는 등 제도적 교회와 신학이 잃어버리거나 간과해 온 신앙의 역동성에 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제도화 된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는 수도원운동과 교회갱신운동의 영적인 원동력이 되었고, 제도교회 내에서는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이끄는 정신의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강조입니다.

 

2.

 

요한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도 알지 못하고 아들도 알지 못하는 악한 시대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악한 세대는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박해하고 죽이면서도,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16:2)하곤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타인에 대한 혐오와 분열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요하고, 설명이 필요하기에 부언을 좀 하겠습니다.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라는 평화학자는 이렇게 폭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를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이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하는 직접적 폭력이 있는 반면, 그러한 물리적 폭력이 자동적으로 지속되게 만드는 구조적 폭력도 있습니다. 문화적 폭력이란, 이러한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합리적이고 정당한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의 체계가 지속되도록 만드는, 일종의 문화적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폭력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종교입니다. 종교는, 테러리즘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대체로 직접적 폭력을 반대합니다. 종교인이 폭력항쟁을 지지하는 건 매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또한 예언자적 감각을 지닌 종교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폭력을 지속시키는 체제인 구조적 폭력에도 저항합니다. 사회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종교인들의 목소리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문화적 폭력의 차원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종교인들은 종교적 진리의 설파를 위한 폭력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 그것을 거룩한 일이라고까지 여겨 폭력을 지지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심지어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문화적 관습에 대한 배타적인 확신과 지속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이들이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의 체계를 고수한다거나,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이 공동체 내에 있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을 고수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에도 이러한 문화적 폭력의 예시는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시대에 죄인들, 세리들,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 성매매여성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 이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거룩하다는 이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세리와 창녀라고 말하는 성매매여성들이 대표적인 죄인 취급 받던 이들이 아닙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전에서 올라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들 저주받은 이들과 같지 내지 않으시고, 선택받은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 내셨음을 감사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 바쳤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동족의 세금을 갈취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소득이 드러날까 십일조를 속여서 바침으로써 율법 중심 사회에서 정죄를 당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셨나요?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18:14)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거룩한 이들은, 요한의 말로 하면,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16:2)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회개의 변화의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천대 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성매매여성들은 또 어떻습니까? 실상 성구매자들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방 남성과의 동침을 통해 유대민족의 순혈성을 더럽히는 이들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아예 직업적으로 어기는 존재였기에 율법주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리나 성매매여성으로 대표되는 죄인은 사회문화적으로나, 종교율법적으로나 당대에 설 자리가 없었던 이들이고, 어려운 말로 하면, 타자화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다는 건, 그들을 옹호하고, 그들 곁에 있으면, 당신도 그 사람과 같은 부류라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세리와 성매매여성들, 죄인의 친구이셨습니다.

 

3.

 

다시 성령에 관한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의 일을 보혜사, 곧 성령께서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는 일 마다 다 잘 되고, 사업 번창하고, 물질 축복 받는다는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일이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크게 왜곡하고 그 의미를 축소하는 해석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우리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원수 된 자, 버림받은 자, 설 자리를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의 친구가 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문화적 폭력하고 극복해서 원수 된 자와 화해하고, 갈라진 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하는 일일까요?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진리의 편에 선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큰 괴로움인 동시에 번뇌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16:5-6)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신데, 아무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 볼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매주 설교를 하다가 복음의 말씀 때문에 여러분과 갈등을 빚어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아무도 저에게 홍 목사님, 어디로 가세요?’ 묻는 이가 없습니다, 제 말로 인한 슬픔과 분노만이 가득해서 오히려 속으로는 시원하다,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어떨까요?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 때문에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분이 악과 벗하지 않으시고 진리의 편에 서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16:8)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어두운 이들은 죄와 의와 심판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관념 아래, 종교적인 관습의 체계 아래 꼭 묶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이 오시면,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길을 가로막고 선 장벽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더 큰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꿈은 지금의 세계가 상상할 수 없는 내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내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16:12)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죄인과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세상의 꿈, 나를 가로막고 선 저 장벽이 우리가 함께 딛고 넘어가야 할 디딤돌로 변하는 세상의 꿈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꿈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기 전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4.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겨진 날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제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가 받게 되는 권능은 무엇입니까? 그 능력은 무엇입니까?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고, 삶의 질서를 거스르는 초인(超人)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가 얻는 권능은 사랑의 권능입니다. 분열과 갈등의 역사, 상호비방과 적대의 시간으로 점철된 남유대와 북이스라엘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능력입니다. 이방인보다, 저 멀리 있는 외국인들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고 적대적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한 민족, 한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눈 뜨게 되는 역사입니다. 나아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사랑의 증인으로 우뚝 서게 하시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능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교회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기 위해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자에 대한 적대와 미움을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의 고리를 끊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던 주님의 길을 따라, 우리도 성령과 더불어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걸림돌로 여겨지던 존재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는 눈이 저와 여러분에게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분열을 통합으로, 갈등을 화해로, 적대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며 주의 뜻 이루는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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