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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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난 사람

 

본문: 시편 29:1-11; 요한복음 3:1-17

설교: 홍정호 목사 (2018.5.27. 성령강림 후 제1, 삼위일체주일웨슬리회심기념주일)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자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감리교회가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인을 기리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웨슬리회심기념주일 성수의 목적은 웨슬리 목사에게 임한 성령을 우리도 사모하여 우리도 웨슬리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웨슬리는 17385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의 체험 이전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이상한 무관심, 우울함, 냉담함, 자주 죄에 빠짐이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일어난 변화에 대해 웨슬리는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45분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날의 회심은 웨슬리로 하여금 이전부터 지속해 온 경건생활의 방향과 의미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을 받고 하루아침에 다른 이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회심일인 524일 당일 아침에도 웨슬리는 평소처럼 이른 아침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후서 14절의 말씀과 만나 이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 1:4) 또한 이날 오후 웨슬리는 런던의 성 바울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웨슬리는 시편 130편을 주제로 한 찬양대의 찬양 곡 <!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들었습니다. 이 곡을 들으며 웨슬리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곡으로 공감을 느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신도회에 참석하려고 나선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매일 실천하던 경건생활을 그날도 변함없이 계속했습니다. 이른 아침 성경을 묵상했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회심 체험 이전이나 이후나 겉으로보기에 웨슬리에게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올더스게이트 신도회 모임에서 웨슬리는 평소와는 다른 마음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상하게 마음이 훈훈해지는(strangely warmed)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몇날 며칠에 어디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날 이후 그가 형식적인 신앙에서 마음의 신앙으로, 습관이 되어버린 신앙생활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으로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요 성공회 사제로서 흠 없고 경건한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그런 외적이고 형식적인 삶이 그를 구원의 확신과 기쁨으로 이끌 수는 없었습니다. “이상한 무관심, 우울함, 냉담함, 자주 죄에 빠짐이것이 영국국교회의 사제요 신학교수였던 웨슬리가 스스로 진단한 자신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올더스게이트에서의 마음의 변화는 그를 영국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18세기의 위대한 복음전도자요 사회운동가로, 교회의 사제에서 거리의 목사이자 복음전도자로 이끌어내는 위대한 변화의 첫 걸음이 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상황이 회심 이전의 웨슬리와 같았을까요. 유대사람의 지도자이자 경건한 니고데모가 진리에 대한 물음을 안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3:2) 하는 니고데모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고 응답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고백과 예수님의 응답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릅니다. 니고데모는 압니다했습니다. ‘안다는 건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사람의 지도자답게 논리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때문에 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과관계를 역으로 추론한 결과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압니다라고 말한 니고데모와 달리 예수님은 볼 수 없다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아는 것을 중시했는데, 예수님은 보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다와 본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최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1차 산업혁명이란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원거리 이동과 수동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난 때를 말합니다. 2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에서 전기 에너지로 생산 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3차 산업혁명이란 20세기 후반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일어난 혁명,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전환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1,2차 산업혁명이 농산품과 공산품의 생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3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정보기술이고, 정보에의 접근성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의 지능정보통신 기술이 융합되어 경제와 산업,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시대의 혁명입니다.

 

지난 2016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46차 세계경제포럼(WEF)의 핵심 주제가 ‘4차 산업학명의 이해’(Mastering the Forth Industrial Revolution)였다는 사실은, 지능정보통신 기술의 변화를 중심으로 우리시대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이전 시대의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한 번의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제가 웨슬리와 니고데모, 성령의 충만함을 얘기하다 느닷없이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정보의 분석과 축적, 논리적 인과성에 근거한 인식론적 판단보다는 직관’(intuition)통찰’(insight)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많은 전문가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직관과 통찰의 능력은, 그리스도교가 이성 중심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가장 억압해 온, 그리고 가장 그 가치를 경시해 온 능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관과 통찰에 근거한 판단은, 미신적인 것이고, 그런 건 점쟁이들이나 무당들이나 하는 전근대적이고 비계몽적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입니다.

 

직관이란, 감각, 경험, 연산, 판단, 추리 같은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의 능력, 그런 정신의 힘을 말합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추론해서 아는 게 아니라, 딱 보고 아는 겁니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딱 보니까 그렇다, 이렇게 흐름 전체를 읽고 통찰하는 능력이 바로 직관입니다. 만약 제가 학생들에게 이 학생은 A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딱 보니까 이 학생은 A가 받을 만한 학생이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말한다면, 학생들이 뭐라고 할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어떤 사태를 파악할 때 직관에 꽤 많이 의존하는 편입니다. 합리성이란 직관에 대한 부수적 설명 내지는 직관적 판단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나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딱 보고 그렇다 싶으면,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시는 편입니까?

 

제도적 교회에서 성령에 대한 강조는, 늘 부차적인 것에 머물러 왔습니다. 성령에 대한 강조는 덜 교육받고, 덜 부유한 계층의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죠. 주류 신학대학에서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친 목사들은 성령에 대해 좀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합리적 판단, 인과관계에 근거한 분석, 그리고 여기에 근거한 성서주석을 통해 믿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예수님이 하셨을 법한 말씀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성서에서 계승할 만한 가치와 아닌 것을 분리해 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 그것이 근대 신학교육이 추구해 온 탁월성입니다. 직관과 통찰에 의지해 사태를 판단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신학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대체로 그런 감각을 축소시키고, 대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앎의 축적이 불필요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축적된 앎에 머물러서는 다가오는 시대에 대응이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브라질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의 이름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의 이름은 아시나요? 우리는 모르지만, 컴퓨터는 대답하는 데 1초도 채 안 걸립니다. 배움의 목적이 정보의 축적이라면, 인간은 이미 기계에 뒤쳐진 지 오래입니다. 이세돌 9단은 바둑으로 AI를 이긴 마지막 인간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세돌에게 1패를 기록한 알파고 리이후에 새롭게 개발된 알파고 제로’(AlphaGo Zero)는 알파고 리를 상대로 100승 무패를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프로바둑기사들의 기보를 대량으로 입력받아 학습한 알파고 리와 달리, 알파고 제로는 이른바 딥 러닝(deep learning) 방식을 통해 인간의 기보를 보지도 않고, 스스로 독학해서, 학습을 시작한 지 72시간 만에 알파고 리를 상대로 100판을 내리 이겼다는 겁니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그의 책 특이점이 온다에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 넘는 특이점(singularity)의 시대가 곧 열릴 것을 예측한 바 있습니다. 특이점의 시대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뛰어넘는 사이보그, 로봇, 개량인간 등이 여러분과 저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 1.0과 공존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르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그동안 인간의 우월적 능력으로 간주해 온 이성, 판단력, 사고력, 추리력 등을 더 이상 인간만의 능력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드려볼까요?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회심에 이르게 된 것은 그의 합리적 판단과 심사숙고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어떤 정량화가 불가능한 감각을 그가 덧입게 된 것입니까? 그날 거기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훈훈해지는체험을 한 웨슬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 유대사람의 지도자이고 공의회 회원이었던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는 것이 인식이 주된 활동을 하는 영역이라면, 보는 것은 직관과 통찰이 주로 활동하는 영역입니다. 저는 성경은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일전에 드린바 있습니다. 성경은 읽는 책이 아닙니다. 읽고 이해한다 한들 축적된 지식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인식)에 머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입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는 눈, 그 통찰이 우리에게 열려야 합니다. 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입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엉뚱한 얘기를 하면서도 하나님나라를 추구한다고 착각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3.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질책하듯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가 안다고 했기에, 예수님은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알아야 할 건 알지 못하고, 엉뚱한 데 대한 지식을 가지고 나를 안다고 하느냐, 그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11-12)

 

성서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이 깊은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반면, 복음서 가운데 어려운 책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서양의 대()학자라는 이들도 대개 노년에 이르러 요한복음을 읽습니다. 근대 합리성의 체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이들일수록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 아니라, ‘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아는 것, 그것은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신비를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열려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는 노래입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맘착해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이번 주일 본문을 묵상하면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 노래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돈으로도, 선행으로도 못 가는 나라입니다. 신학 박사가 되어도, 설교에 달인이 되어도, 교회 성장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목회적 리더십을 발휘해도, 죄송합니다만, 그런 능력으로는 하나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지금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셔야 갈 수 있는 나라이고, 그 나라에 참여할 믿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 한해 성령과 동행하는 긴 여정의 초입입입니다. 올해 성령강림절에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와 가정과 교회 안에 더욱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다른 것 구하지 마십시오. 오직 성령의 충만함만을 구하십시오. 형식적인 경건생활에 머물렀던 존 웨슬리를 생동하는 마음의 신앙인으로, 뜨거운 복음의 전도자로 일으켜 세우신 성령의 은총이 이 한 주간도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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