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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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

 

본문: 시편 138:1-8; 마가복음 3:20-35

설교: 홍정호 목사 (2018.6.10. 성령강림 후 제3)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놓고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인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두고 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비유를 들어 반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2:27)라고 가르치시고,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3:4) 반문하시며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지켜보는 어떤 이들의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현세의 질서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이미 형성된 제도와 질서를 수호하는 것을 자기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삼았던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눈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고와보일 리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마가는 그가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으므로, 온갖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나 그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3:10)고 전합니다. 또한 악한 귀신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다고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치유 경험인 동시에 병든 이의 정신과 영혼을 짓누르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가 악한 귀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정신의 치유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정신의 질병이라는 것은, 주로 타인과의 관계맺음의 방식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정신의 치유는 곧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는, 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사회적)인 치유이자, 육체와 정신의 통합해 내는 영적인(종교적인) 치유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온갖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고자 그분에게 밀려들었던 이유입니다.

 

2.

 

본문이 전하는 때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는지, 예수님 일행은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리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는 짧은 언급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습니다만, 가족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정상이 아니라는 말은, 이른바 정상으로 규정되는 사회문화적이고 규범적일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삼는다는 뜻이 될 겁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광기의 역사>를 보면, 정신병이라는 것이 이성중심의 서구문화에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면밀히 탐색해 나갑니다. 푸코에 따르면, 정신병이라는 것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기라는 이름으로 사회문화적 지평 속에 융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광인들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근대 정신병원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광기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광기는 사실 동서양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신적인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신적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를 미쳤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저속한 이들이라고 꾸짖었습니다.(조대훈, “마가복음 바울세불 논쟁의 크레이아에 관한 수사학적 연구,” <신약연구>, 14, 46쪽 재인용)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은 이들도 술에 취한 이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 예수님, 그리고 성령을 받은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정상이라는 사회문화적 규범의 틀로부터 어긋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어긋남으로부터 체제의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의 틈으로부터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대의 이단자들입니다. 무엇이 정상인지를 규정하는 문화적 규범으로부터 빗겨나서 더 큰 질서, 보다 근원적인 질서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을 시대는 이단자로 규정해 왔습니다.

 

어렵게 군 복무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군대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병사로 복무하던 시절 하루에도 자주 듣던 말이 있었습니다. ‘미쳤어? 미친 거야?’ 하는 선임의 말입니다. 전문 학술용어로 갈굼이라고 합니다.(웃음) 슬리퍼를 선에 맞춰 정렬해야 하는데 선에서 좀 벗어났을 때, 걸레질을 한 방향으로만 해야 하는데 양방향으로 닦았을 때, 해야 하는 일의 이유를 물었을 때, 선임 병들에게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반응이 미쳤어? 미친 거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제가 미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용납하지 않고, 부조리한 관행을 마치 신성한 것이라도 되는 양 수호하는 체제야말로 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조리한 관행을 견디며 그때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한다는 억압의 일상화야말로 문제의 근본입니다. 기성세대는 군대에 다녀오면 이 든다고 하지요? 시대가 공유하는 정상적질서에 부합하는 인물상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는 인준의 표현이겠습니다.

 

3.

 

율법중심사회의 근간이 안식일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병자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님을 두고 예수가 미쳤다’,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말하는 건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습니다. 율법학자들, 그러니까 당대에 하나님을 그 어떤 이들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던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악귀에 들린 사람,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삶을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따르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일상에서 체현(體現)해 내는 삶이 그분이 가신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악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에 맞서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한 나라나 한 가정이나 같은 편끼리 갈라서서 싸우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같은 편끼리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편에 대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다른 편인가요? 가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사실 내편 네 편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분 안에서 인류는 한 형제요 자매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편을 가르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익숙한 논리를 활용해서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듣기에 따라 어색할 수도 있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3:27) 이 비유는 복음서를 읽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아니, 예수님이 남의 집을 털어가는 비법을 말씀하시다니!’ 이 말씀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농담을 섞어 하신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유란 유연한 것이고, 도덕적인 판단에 앞서 사람들에게 메지시의 본질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로부터, 악한 영과 싸우려면(악한 영의 권세 아래 놓인 자를 해방시키려면) 먼저 악한 영을 결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악한 영보다 영적 권세가 약하다거나, 타협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능력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악한 권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영적 해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결박은 무력(武力)으로 하는 결박이 아니라는 겁니다. 악한 영을 결박하는 영적 능력이란, 능력은 능력이되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일전에 함석헌 선생님께서도 말씀하길 사랑은 강한 자가 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비슷하면 싸웁니다. 저희 애들 보니까 자주 티격태격하는데, 제가 보면 둘이 똑같은데, 다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삐지고 울고 저한테 와서 이르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애들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힘의 압도적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력에서 우위에 있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정신의 크기에서, 사랑의 크기에서 어린아이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는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는 대신 사랑으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영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를 꾸짖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사랑의 힘에서 압도적 우위에 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악한 영과 싸우시는 대신 자비와 용서의 더 큰 힘으로, 악한 권세를 사랑으로 굴복시키시며 참 자유와 해방을 이루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이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다툼과 분쟁이 아닌, 압도적인 사랑의 힘으로 이기는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그분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주간도, 예수 사랑의 힘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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