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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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본문: 시편 130:1-8; 마가복음 5:21-43

설교: 홍정호 목사 (2018.7.1. 성령강림 후 제6)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시는데,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어댔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가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하는 말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칠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말 그대로 보리 수확을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을에 씨를 뿌려 초여름에 수확하는 보리의 수확을 감사하며, 한 해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비록 우리교회는 맥추감사절을 따로 지키지 않습니다만,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남은 절반을 시작하는 첫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맞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맥추감사절을 보내는 오늘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오늘 본문에는 두 이야기가 합류되어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된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난 이야기가 마가의 이야기 속에 하나로 얽혀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 예수님 일행의 동선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갈릴리 저편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시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 사이에 사는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 그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은 배척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덤 사이로 추방해 버린 부정한 사람이 온전해져서 다시 자신들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를 떠나시기 전 귀신 들렸던 그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무덤 사이에 살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금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거라사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 유대인의 땅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 지역이 아닌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과 죽은 소녀를 마주하셨습니다. 마가가 거라사 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와 혈루증 앓는 여인, 그리고 죽은 소녀의 이야기를 나란히 이어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부정한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대에 부정한 존재로 간주되는 대표적인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나병환자, 피나 고름 등의 유출증을 보이는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 거주할 수 없고, 추방해야만 합니다. 이들과 접촉한 이는 모두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5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을 탄 사람은 모두 진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지시하여라.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진 바깥으로 내보내어, 내가 머물고 있는 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여라.’”(5:1-2)

 

그런데 마가가 전하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가 몸쓸 병에 걸린 소녀의 아버지라는 사실보다 회당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당장인 그는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잘 알 뿐만 아니라, 회당장으로서 율법 준수의 모범을 보니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와서 병든 딸을 살려 주시도록 간청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회당장이라 할지라도 병든 딸이 낫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병든 딸을 고치는 일은 누구나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동안에 회당장의 집에 사람들이 비보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비보의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야이로는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그의 딸은 죽은 몸이 되어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이로는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이로 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이른바 언행일치를 실행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슬픔을 이기고 자신이 가르쳐 온 대로, 율법이 명한 대로 행하기를 그들은 기대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야이로가 그들이 바라마지않는 그 언행일치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청을 거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려야 합니다. 자신의 딸이라도 죽은 몸은 부정한 것이니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만류해야 합니다. 야이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가는 야이로의 다음 반응이 어땠는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을 이어서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아무튼 마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기의 죽은 딸을 만나러 가는 것을 막지 못했고, 율법을 어기도록 방조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마가가 전하는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죽은 소녀를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율법이 규정한 부정한 몸, 죽은 몸에 손수 손을 대셔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2.

 

야이로 이야기 중간에 끼어 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의 구조도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녀도 율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취급된 사람이었고, 접촉이 금지된 존재였습니다. 살아있었으나 살아있는 존재로 취급되지 못한 그런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람들의 공분을 살 일을 했습니다. 바로 자기의 부정한 존재를 숨기고 많은 무리들 속으로 숨어들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일종의 테러행위와 다름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죠, 이것은 테러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유출증에 걸린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들은 그 여인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멀리서부터 경계하고 추방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기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사람들 사이에 잠입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과격한 행동에 성공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입국이 거부된 어떤 이가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잠입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핵심지역으로 들어왔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비록 그에게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위험인물이 경계를 넘어 우리의 안마당까지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경악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율법대로라면 이로써 예수님도 부정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과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접촉을 당하신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로 오기까지 그녀와 접촉했던 수많은 이들도 본의 아니게 다 부정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율법중심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범죄행위, 그것도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일을 지금 행한 것입니다. 마가가 전하는 이야기의 심각성이 다가오십니까?

 

마가는 그녀가 겪은 인간적인 고통을 서술합니다. 혈루증을 앓는 동안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그 세월동안 그 여인이 겪었을 고난이 이 짧은 한 문장에 다 녹아 있습니다. 몸은 몸대로 힘들고, 돈은 돈대로 다 써버리고,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다 떠나버린 처지에 있는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장 돌아 맞아 죽는다 한들 아무도 그녀를 불쌍히 여겨 줄 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숱한 좌절을 경험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이런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병을 앓은 지 열두 해가 되었습니다.

 

3.

 

앞서 죽은 소녀도 열두 살이었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도 열두 해를 앓았습니다.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기시키면서 완전을 지향하는 율법의 요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 열 둘이라는 숫자를, 거꾸로 부정한 존재를 묘사하는 데 사용합니다. 복음서의 전복성이 이런 디테일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마가는 율법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정당화하기보다는 그 경계를 무화(無化)시킴으로써 참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읽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수 있다면, 굳이 시신이 있는 장소까지 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며 살리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말씀으로 하시면 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서 나을 병이었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하지 말고, 옷깃을 스치기 전에 그냥 멀리서 보시고, ‘, 오지 마, 다 낳았어이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마가가 굳이 예수님과 부정한 존재들의 접촉에 대해 묘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지키는 거룩한 경계라고 굳게 믿었던 그 경계선을 지워버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장소성(placeness)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성서학자 크로산은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초대하는 데 있어서 그 사회의 경계선을 지키는 사람들’(boundary keepers)에 대한 도전을 감행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이 경계선을 지키는 사람들이 고수해 온 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방식으로, 당신을 대안적 의미에서 경계를 지키는 자’(alternative boundary keeper)로 제시하셨습니다(크로산, 한인철 역,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123.)

 

율법이 정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자로 그 경계를 한정했지만, 예수님이 새롭게 정하신 경계는 달랐습니다. 그 새로운 경계는 무엇이었나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낙인찍힌 이들이 나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고침 받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고 믿었던 이들이, 이제 다 끝났다고 여겼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 여인을 향해 딸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이렇게 선언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그 여인의 육신의 질병뿐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존재의 회복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뜻하지 않게 경계를 지키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켜야 할 복음은 무엇이고 허물어야 할 경계는 무엇인지, 우리에게 익숙한 편견과 관습에 의지해 허물어야 할 경계를 복음인양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굳게 지켜야 할 복음을 허물어야 할 경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길을 찾아 돌아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는, 그리고 저와 같은 종교인들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신앙의 이름으로 약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추방을 정당화 해 온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이 분명 공동체를 보호하는 한 방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경계를 넘어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를 향해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딜 것을 요청합니다. ‘경계를 지키는 자에 머무는 것을 넘어, ‘대안적 경계를 만드는 자, 나아가 크신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의 꿈으로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셍명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요, 복음이 전하는 생명과 평화의 길입니다. 경계를 넘어 사랑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복음의 일꾼으로, 평화의 사도로 한 주간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