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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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목자

 

본문: 시편 89:20-37; 마가복음 6:30-34

설교: 홍정호 목사 (2018.7.22. 성령강림 후 제9)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 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아홉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열두 사도(6:7)가 사역을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와 그간의 일들을 보고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주님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은,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회개를 선포했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주었습니다(6:12-13).

 

1.

 

사도들의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분주하게 사역을 하느라,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돌아와 사역을 보고하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6:3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쉼은 명령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 즉 안식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정함으로써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자발적으로 쉼을 택할 수 없는 이들의 안식까지도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으니, 그동안의 성과가 좋았으니, 이제는 쉬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쉼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명령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한 듯 보이고, 시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이르러 그 일을 멈춤으로써,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이 일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만 더 하고, 여기까지만 하고, 이거 하나만 마무리 하고하면서, 때를 놓쳐 버리고, 일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몰입이 주는 희열이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일의 몰입감에 빠져 있다 보면 일이 사라졌을 때 일과 더불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주한 사역 가운데 정신없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하고 명령하신 이유도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예수님 일행은 쉬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벌써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 마을이든 도시든, 농촌이든 장터거리(6:56)든지 간에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찾아와 저마다의 바람을 청했습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 그분을 따라다니는 이들의 열심을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당신을 찾아온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기적이나 치유를 바라며 온 이들, 그들의 절박한 사정이 딱하지만, 그들은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될 마음은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보다 이를테면 더 영험한치유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그리로 몰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여기셨는데, 이것은 예수님도 그들의 목자는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건 목자가 아니라, 목자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언제든 옮겨갈 수 있는, 심지어 쉽게 사고 팔수 있는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2.

 

성경에는 양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세어 봤다는데 100번 이상 나온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의 동생 아벨이 양 치는 자(4:2)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양은 성경의 무대인 근동지방에서 오랫동안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당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기도 하셨습니다(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인 반면,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버린다(10:1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고 있어서, 이른바 삯꾼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만, 예수님 당시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수백 마리, 혹은 수천 마리 양을 가지고 있는 주인은 일정한 삯을 주고 삯꾼에게 자기 양을 돌보도록 맡기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돌볼 수 있는 양의 숫자가 수십 마리 정도이니, 양이 수백 마리쯤 되는 주인이라면, 이런 삯꾼을 여럿 고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양들이 평화롭게 잘 지낼 때는 삯꾼이라 해도 주인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즉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늑대와 싸우고 늑대를 쫓아버리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삯꾼은 돈벌이가 목적이기 때문에, 늑대가 나타나면 우선 도망갈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양도 아닌 마당에 돈 몇 푼 받자고 늑대와 싸우면서 목숨 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비록 삯꾼이라도, 주인이 맡기신 양을 자기 양 돌보듯 하는 사람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비록 자기 양은 아니라 할지라도, 마치 자기 양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양을 돌보는 이는 삯꾼이라 할지라도 선한 목자입니다. 제 생각에는 어쩌면 그 삯꾼이 주인보다 더 훌륭한 목자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넓은 초원에서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양떼를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지난 주 우리교회에 피아노 조율사 선생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벌써 몇 해째 일 년에 한두 차례씩 다녀가시는 분인데, 오랜만에 그분과 식사를 하다 감동받은 이야기가 있어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조율사 선생님의 선생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피아노 조율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1호로 명장이 되신 분이고, 여든이 넘으신 나이에도 예술의 전당 피아노 조율을 맡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 조율사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대화의 절반이 선생님에 대한 자랑과 감사였습니다. 선생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자신은 지금 그 반에 반도 못 미치고 있어 늘 부끄럽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분도 지금은 세종문화회관 조율을 담당하는 실력이신데 말입니다. 이 조율사 선생님이 당신 선생님을 만났을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이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여러 조율사를, 그분 말로는, ‘쫓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고, 부분적으로 조금 한 수리한 걸 가지고 전체를 다 한 것처럼 말하면서, 눈속임으로 쉽게 돈을 버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 사람들에게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렇게 몇몇 선생을 쫓아다니다 별 기대 없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분이 지금의 선생님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은 말씀이 없는 분이었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법이 없이, 그냥 당신이 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도록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치는 집에서 혼자 치는 피아노를 만나거나 큰 콘서트홀의 그랜드 피아노를 만나거나, 그런 것 구분하지 않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율을 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전에 만난 선생들과 비교가 되어 언젠가 여쭈어보았답니다. “선생님,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대충 하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세요?” 그랬더니 한 말씀하시더랍니다. “내가 알고, 자네가 알고, 하늘이 알고, 그럼 된 거 아닌가?”

 

이 조율 명장 선생님은 자기 피아노가 아닌 피아노만 만나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피아노마다 마치 당신 피아노인 것처럼, 어쩌면 당신의 피아노보다도 더 정성껏 그 피아노를 만지고 닦고 수리하는 일을 일평생 해 오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당신이 최고의 명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선생님의 후광을 입어 선생님이 추천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이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삯꾼 목자는 주인이 볼 때는 양을 위하는 척 하지만, 주인이 보지 않을 때는 나몰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비록 삯을 받고 고용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양들을 정성으로 돌보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알고, 하늘이 알고, 그럼 된 거 아닌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이입니다.

 

3.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목자는 우선, 자기 양의 이름을 압니다. ‘이름을 안다는 건 그 존재를 안다는 겁니다. 가축이라 할지라도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부르게 되면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대량으로 사육되는 닭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닭들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이 선한 목자의 첫 번째 자격입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양들의 길 안내자 됩니다. 이렇게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 목소리를 따라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꾸 이름을 불러서 목소리를 각인시켜야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합니다. 이리떼가 오면 도망가기 바쁜 삯꾼과 달리, 선한 목자는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양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양떼에 대해 권위를 갖게 되고,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의 통치는, 서양의 통치와 권력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의 통치, 즉 목자가 권력을 갖는 목적이, 양들을 보다 쾌적한 곳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리더십을 얻게 되는 것, 이러한 통치의 방식은 그리스로마적인 통치방식에 익숙한 이들이 볼 때 낯선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하들을 부립니다. 부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황제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좋은 신하의 의무로 추앙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목자의 통치 방식은 반대입니다. 그것은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강제나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헌신의 방식으로,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유지되는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히브리적 통치의 방식, 즉 양과 목자의 관계에 의한 리더십은 상당히 이상한 권력”(나카야마 겐, <현자와 목자>. 전혜리 옮김, 그린비, 2016, 256-258)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얻은 방식 그대로입니다. 다른 이를 억압하고,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서열로 누르는 통치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을 몸소 희생하심으로써 얻게 되는 권위, 그것이 선한 목자가 양무리를 이끄는 방식입니다.

 

4.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그분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욕심을 채워줄 분, 긴급한 필요를 채워줄 분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양떼가 되어야 합니다. 목자 있는 양,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은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습니다. 자기의 목자를 신뢰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길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꽃길이라고 가고, 가시밭길이라고 멈추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가 이끄는 곳으로 갑니다. 한 주간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 의와 생명의 길로, 참된 평화를 만드는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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