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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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사람

 

본문: 시편 14:1-7; 요한복음 6:16-2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7.29. 성령강림 후 제10, 청년부 헌신예배)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크게 두려워한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청년부 주관으로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시편 14편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새번역에 참여한 분들에게는 섭섭한 말이겠지만, 시편만큼은 다른 번역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가톨릭성경이나 공동번역의 시편 번역을 선호합니다. 오늘은 가톨릭성경의 번역으로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 하는 모든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 거기에서 그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니 하느님께서 의인의 무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가련한 이의 뜻을 너희가 수치스럽게 만들지만 주님께서 그의 피신처이시다. ,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베풀어졌으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 야곱이 기뻐하고 이스라엘이 즐거워하리라.” (<가톨릭성경>, 시편 14:1-7)

 

시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누구입니까?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는 게 많고 똑똑하지만, 행실이 어리석은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2.

 

우리시대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려면 꽤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이들 가운데 소신 없고 똑똑하지 않은 이를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무신론자로 여기는 이들은 대체로 아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도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인을 계몽시키려는 의지가 신앙인 못지않게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선교(宣敎)대 선교(宣敎), 계몽대 계몽으로 맞서는 겁니다. 그래서 무신론 집단이 하는 일들을 가만히 보면 근본주의적 종교집단이 하는 일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근본주의적인 무신론자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오히려 소수고, 착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무신론자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시대는 무신론자들이 도덕적으로 더 타락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지적으로 정직한 무신론자들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힘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수가 유신론자인 시대에 무신론자들은 타락한 이들, 부도덕한 이들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다수가 무신론자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유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말만 번지르르 한 사람언행불일치를 일삼는 이들이라는 거친 시선에 노출된 삶을 살아갑니다.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잘못들에 대해서도 신앙인에게는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적용됩니다.

 

그런데 시인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이론적 무신론자를 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예배도 드리고, 예물도 바치고, 봉사도 하지만, “마음속으로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유대공동체는 모두 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공동체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우리의 지금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같은 장소에 모여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드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앞서 읽은 가톨릭성경의 번역으로는 가련한 이의 피난처가 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3.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일컬어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으신 하나님, 어느 한 편을 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불편부당하신 하나님은 약자들의 고백이지 부자와 강자들의 고백이 아닙니다. 세상이 다 돈 있고 힘 있는 이들 편에 서서 약자들을 억압할 때 불편부당하신 하나님은, 세상이 다 귀 기울이는 그이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연약한 이들의 목소리도 차별하지 않고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불편부당하신 분이시지만, 철저하게 편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하나님과 다른 야훼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철학자들의 신, 관념 속에 존재하는 신은 보편을 지향합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신의 모습을 취해야하기 때문에 감정이 없고 편을 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의 억압 아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 민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 출애굽기 아닙니까? 그런데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인들, 그들은 난민입니다. 환란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도 주면서 살게해 주었는데, 숫자가 날로 늘어나서 이집트 토착민들을 위협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히브리인들에 대해 좀 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히브리인들 입장에서는 이게 억압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한국에 피난 온 난민들을 받아들여서 도와주고 일자리도 주고 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 일찍이 한국인이 된 사람들의 처지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게 된 상황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들끓는 국내 여론을 잠재우려고 난민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난민들이 억압을 받는다며 그들의 하나님에게 읍소하며,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 '우리'에게 도전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집트 사람들 입장에서는 꽤 억울한 일이 될 겁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가 약자인 히브리인들의 처지와 우리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약자가 아닌 강자의 입장에서, 갑의 입장인 이집트인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성서의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 저놈들, 저 근본 없이 떠도는 하삐루 녀석들, 저 녀석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까지 줬더니만 이제 와서 억압 운운하다니, 배은망덕한 놈들이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서를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의 외침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그분은 히브리 민족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분, 그들의 눈물의 호소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약자의 편을 드시는 분입니다. 이 말이 불편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외면하면, 제가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약자란 어떤 이입니까? 정치적으로는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 문화적으로는 소외되고, 사회적으로는 단절된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난한 이들의 편이시고, 가련한 이들이 피난처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 무슨 유신론 무신론 개념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약자의 편을 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가련한 처지에 있는 그를 살릴 뿐만 아니라,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세상에서 경험한바 많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작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태, 즉 빛이 없는 무명(無明)의 상태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고전 8:2)이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참 신앙의 출발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23-24) 야훼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편드시는 하나님입니다. 특별히 억눌린 이들,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 가련한 이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으시고 그 외침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하나님이 철학자들의 하나님과 다른 성서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고살려면,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마음과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자의 마음이요, 낮은 곳에서 바라보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낮은 곳,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연약한 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그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성경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낮은 자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스스로 높은 자라고 여기는 한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와 관계없는 다른 이들이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인이 탄식한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어떤 위로인가요? 낮은 자들이 꿈꾸는 세상이 좌절될 때 찾아오는 절망에 대한 위로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창조된 바대로 자기 몫을 하며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를 밥 먹듯이 먹어버리는 사람들,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해 타인을 도구로 써 버리는 이들에 의해 세상은 병들고 타락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면서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입니다. 낮은 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고, 낮은 이들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그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에게는, 참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믿는 가운데 찾아오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5.

 

오늘 청년부 헌신예배입니다. 교회의 미래인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바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제게 신반포교회 목회를 맡겨 주시는 동안 저는 우리교회에 의인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인은,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등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생활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청년들이 세상에 끌려 살아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청년들,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낮은 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잃지 않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교회의 자랑은, 여러분이 앞으로 세상에서 영향력 있고 훌륭한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감사할 일입니다만, 교회의 자랑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자랑할 것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사람, 의인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신반포교회의 앞날을 책임질 청년들이, 가난한 이들을 편드시는 하나님, 약한 자들의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기쁨을 얻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특별히 우리 청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