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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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시는 하나님

 

본문: 시편 130:1-8; 요한복음 6:41-5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8.12. 성령강림 후 제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하였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요한복음 6장입니다. 여러분 입장에서는 지난 주 들은 주제가 반복되고, 제 입장에서는 지난주 설교 주제가 반복되어 난감합니다. 더 난감한 건 뭔 줄 아세요? 다음 주 본문 주제도 요한복음 6장이라는 겁니다. 어제 미역국 먹었는데, 오늘도 미역국, 내일도 미역국인 경우죠. 어느 교우 한 분은 어쩌다 짜장면을 네 끼 연속 드셨답니다. 짜장면을 특별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짜장면이나 먹을까 해서 집에서 점심 한 끼, 저녁 회의에서 동료 직원들이 짜장면 드시자고 해서 한 끼,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이 짜파게티 먹고 싶다고 해서 한 끼, 마지막은? 그날 교회 점심 메뉴가 짜장면이어서 또 한 끼. 오늘 본문은 네 주까지는 아니고, 세 주만 반복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농담으로 말씀을 열었습니다만, 이렇게 본문이 중첩되는 것은 요한의 의도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어 가면 같은 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양식이라는 간단한 주제가 네 번에 걸쳐 반복됩니다(6:22-33; 34-40; 41-51; 52-59). 35절은 반복되는 네 번의 설교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6장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생명의 빵이시고,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채워진다는 메시지입니다. 요한은, 참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그분의 살과 피, 즉 그분의 존재를 우리 안에 모시고 받아들일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2.

 

지난 주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께서 행하신 어떤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따르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이런 전적인 순종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 참 믿음은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순종이라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주체적이고 지성적인 현대 기독교인들의 경우 순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이가 주체가 되고 내가 거기에 따르는 순종이 마치 자기의 미성숙이나 종속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순종보다는 자발적으로혹은 주체적으로어떤 일을 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거슬러 다른 이가 주체가 되고 내가 거기에 따르는 순종이 갖는 의미를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자칫 순종을 말하는 이의 말에 순종하라는 의미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죠.

 

레비나스라는 유대인 철학자가 있습니다. 서양의 근대철학이 모두 주체에 대해 말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인 20세기 사상가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그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라는 서양의 근대정신이 타자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추적하고 비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주체성이 중심이 되는 문화 속에서 타자는 언제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부수적 존재에 머물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비춰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철학사에서 데카르트 이후 고양된 의 지위는 재고되어야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판단이 계몽의 척도가 되는 시대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류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풍요와 번영을 가져왔지만, 그 이면에는 자연에 대한, 동료 인간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폭력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비판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중심이 되는 문화 속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도 아니고 순종을 말한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예수님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고,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기적을 요구할 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3.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주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에는 열광하지만, 그분의 말씀 앞에서는 다들 주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아닌 실망과 좌절을 안겨줄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10:34) 칼은 갈등과 분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는 평화가 있지만,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진실을 가리고, 정의를 외면하는 데서 오는 평화인 반면,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평화는 진리와 정의가 빛나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렇기에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를 거스르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에 안주하고, 예수에게서 그런 평화를 얻으려고 오는 이들에게 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먹고 마시는 이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참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온 모든 이가 이 평화를 누린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이들이 이 평화에 이를 때까지 인내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37절과 38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6:37-38)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아닌 다른 이가 중심이 된 삶을 사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이가 아니라, 다른 이 속에 계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오는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요, 물리치지 아니하시리라 결단하셨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신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오는 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이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는 관계에서는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타인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으로 맞이할 때 다툼은 사그라지고 자비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관계에서는 내가 싫은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피하고 함부로 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관계에서는 당장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를 받아들일 공간이 내 안에 마련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기에 앞서,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신 사람이요, 내가 할 일은 내 뜻을 행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관계의 중심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를 앞서 말씀드린 현대철학의 용어로는 타자 중심적 전환이라고 합니다. , 곧 주체가 중심이 되는 관계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그래서 타인에 대해 쉽사리 폭력적이 되곤 하는 그런 관계로부터, 타자가 중심이 되는 관계로 인식의 축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타자는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뜻밖에 찾아오는 선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하셨습니다. 내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는 이, 그는 비록 내가 만나기로 작정하고, 시간을 내고, 장소를 마련해서 만난 이이지만, 그렇게 만나기에 앞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서내 앞에 있는 이입니다. 이렇게 마음먹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신앙실천의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면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특별히 기도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도, 다른 소소한 일로 저와 문자를 한다거나 통화를 한다거나 이메일을 하는 경우, 저는 그분과 그분의 가정을 위해 반드시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저의 신앙실천을 위한 훈련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만나는 것, 사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우연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대면하는 것도 그렇지만,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거나, 그 내용이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소소한 일이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서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제가 놓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고백이요 실천입니다.

 

그것은 또한 혼돈의 시대 제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목사로 산다는 것,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기에 제가 부러운 분이 계십니까? 어제 무슨 교회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었는데, 어찌나 험한 말이 많던지, ‘아 정말, 이 나라 이 시대에는 목사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구나생각이 들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문제는 그 험한 댓글들이 표현이 거칠 뿐 틀린 말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소명을 추구하는 길이 무엇일까, 그것은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서하는 일이요, 만나는 이들도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서만나는 이라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간직하며 사는 길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사만 그렇습니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직업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다른 이의 허물을 들춰내고 망신주기에 급급한 우리의 거칠어진 마음이 슬픕니다. 건물주가 어린 아이들의 꿈이 되는 시대에 자신이 하는 일의 잠재성에 투자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끼며 한길을 간다는 것이 어느 일이나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4.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만나는 오늘의 양식입니다. 하루를 살아가기에 족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만나와 같은 기적은 광야를 건너면 그칩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었어도, 광야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기적이 끝나는 시간은 옵니다. 그리고 기적의 시간이 지나면 감동이 사라지고, 열정도 식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인 예수를 모신 이들, 그분을 모신 이들은 기적이 아니라도 영원히 사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영적인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모신 이들에게는 일상이, 우리가 경험하고 마주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 의지하여 기적의 만나가 아닌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오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믿음 가운데 서서 나는 내 뜻을 행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한 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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