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38 댓글 0

솔로몬의 간청

 

본문: 열왕기상 2:10-12;3:3-14, 요한복음 6:51-58

설교: 홍정호 목사 (2018.8.19. 성령강림 후 제13)

 

[다윗은 죽어서, 그의 조상과 함께 다윗 성에 안장되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그 왕국을 아주 튼튼하게 세웠다./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였으며, 자기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랐으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 기브온에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 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이 그 때까지 그 제단에 바친 번제물은, 천 마리가 넘을 것이다. 한 번은, 왕이 그리로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 날 밤에 기브온에서, 주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하셨다.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요 나의 아버지인 다윗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그 큰 은혜로 그를 지켜 주셔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그 보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나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주님의 종인 나를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처신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곧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계산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백성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마음에 드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를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네 일생 동안, 왕 가운데서 너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네가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네가 오래 살도록 해주겠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열왕기상 3장에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의 마지막 임금입니다. 기원전 1030년부터 933년까지 약 한 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세 왕의 통치를 통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이어진 이스라엘의 통치는, 떠돌이 부족에 불과했던 히브리 민족을 주변 열강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져 놓은 초석 위에 다윗은 군사력을 더했고, 솔로몬은 탁월한 외교적 수완과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우리시대의 말로 하자면, 이른바 정상국가’(normal state)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세 왕은 개인적 성향은 물론 그들이 성취해야만 했던 역사적 과제도 달랐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환경도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 세 왕에게는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때 위대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떠났을 때 타락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 왕이었던 시절, 그들은 깨어 있어,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들의 권력과 부가 일상이 되었을 때 그들은 백성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부터도 떠났습니다. 가까이에서 보고 들으며 체득한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오늘의 주인공인 솔로몬 역시 앞선 사울과 다윗과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2.

 

솔로몬은, 열왕기상 212절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다윗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그 왕국을 아주 튼튼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기록자의 이 짧은 진술은, 실은 복잡하게 얽힌 권력의 서사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그 왕국을 튼튼하게 세웠다고 하는데, 다윗이 앉았던 자리가 보통 자리인가요? 왕의 자리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위 계승의 문제는 인간의 온갖 욕망이 드러나고 충돌하는 복잡하게 얽힌 과정을 반복합니다. 왕정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된 시대에서도 무슨 선거자만 붙으면, 애들 반장선거부터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 할 것 없이 동원가능한 모든 지혜와 자원이 총 동원됩니다. 종교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요새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기독교 모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나, 불교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들은, 세속의 질서를 초월하겠다는 종교가 강력한 세속의 구심력에 붙들려있는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합니다만, 언론에서 말하지 않고 볼 수 없는 일상의 디테일로 들어가면, 무슨 자리 하나를 놓고 다투는 일에 각종 신성한명분들이 동원되고, ‘가 아니면 안 되고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우리 일상입니다. 하물며 왕정시대 왕위를 계승하는 문제라면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는데, 다윗이 자기 부하의 아내를 범해 얻은 아들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욕정을 질책합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기 위한 밧세바의 계략에 다윗이 걸려들었다는 해석입니다. 여성혐오적 시각이 우려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이런 해석에도 일리는 있겠다 싶습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원래 다윗 왕위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의 배다른 형 아도니야에게 돌아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아도니야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던 바이기도 했습니다.(왕상 2:15) 그런데 밧세바는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다윗의 측근들을 포섭해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신임을 받는 대제사장 사독, 다윗이 우리아를 범했을 때 고언(苦言)을 하면서 다윗의 회개를 촉구했던 선지자 나단, 그리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비롯한 숱한 반란시도를 진압하며 다윗에게 충성을 다한 브나야 장군을 자기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런 일은 아직 어린 솔로몬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왕이 된 데에는 어머니 밧세바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아주 튼튼하게세워나간 방식은 정적의 숙청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권을 두고 경쟁했던 형 아도니야를 죽이고, 아버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을 파면하여 고향으로 쫓아버렸습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한 장군 요압을, 그의 경쟁자이자 다윗과 솔로몬에게 대를 이어 충성하는 브나야를 시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울 왕의 친척으로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시므이를 숙청함으로써, 솔로몬은 왕위 계승 이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왕상 2:46).

 

3.

 

우리가 기억하는 솔로몬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후, 즉 왕권이 튼튼해 진 이후 외교력과 무역을 통해 이스라엘을 번영으로 이끈 왕입니다. 내부적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그는 이스라엘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는 먼저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패권제국인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솔로몬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보호막을 갖는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진가는 이제부터 발휘됩니다. 어머니 밧세바의 전략을 통해 왕이 된 솔로몬은, 이제 한 세기 남짓 지난 약소국의 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눈 뜹니다.

 

그는 선대 다윗 왕이 하나님께 자비를 얻어 통치한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요 나의 아버지인 다윗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그 큰 은혜로 그를 지켜주셔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그 보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왕상 3:6)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 그것이 다윗이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붙들린 삶을 살아간 이유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란 솔로몬은, 귀중한 교훈을 체득하며 자랐습니다. 그것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의 한복판에서도 결국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략을 짜고, 측근을 포섭하고, 정적을 숙청하는 등 권력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권력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보며 배웠습니다.

 

저는 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구약이 그려내는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됩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윤리학자들이 종종 지적하듯이, 인간적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너무 높은 경지에 계셔서, 감히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 엄두를 못 낼 때가 있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요새는 이런 걸 공감피로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을 자꾸 들으니까 피로감이 쌓여 결국 아무 말에도 공감하지 않게 되는, 이런 공감피로가 현대사회의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공감피로를 매주 생산해 내야 하는 목사로서는 반가운 지적이 아닙니다만, 이해는 되는 말입니다. 저도 어느 분 설교를 듣다가, 꺼버린 적이 있습니다. 제 딸이 어릴 때였는데, 집에서 아기를 재우면서 설교를 듣는데, 저는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아이는 곤히 잠드는 것을 보면서 너는 참 좋겠다, 저 말을 들으면서 잠이 와서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리고 살아있는 복음의 증언은, 때로 이렇게 잠을 쫓아 버리고, 듣는 이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이런 급진적인 면에 비해 구약성서는 좀 더 인간적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한 명 흠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흠도 보통 흠이 아니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혐오의 대상이 될 만한 그런 결정적인 흠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중요한 일꾼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늘 놀랍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며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드린 성군으로 기억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도 왕정정치의 한복판에서 다른 권력자들이 다 하는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친 인물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를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가르침을 실천한 인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을 비롯한 사울과 다윗 왕에게 달랐던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그 질서의 주관자가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애썼습니다.

 

4.

 

세상의 왕들은 권력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은 권력을 목적이 아닌 하나님과 백성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취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왕이 되었다고 해서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거나 더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위에 있는 동안 행여 잘못된 판단을 하지는 않을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악덕을 끼치는 왕이 되지는 않을지, 자기를 돌아보기에 힘씁니다.

 

흔히 말하길,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솔로몬은 무엇을 원합니까? 왕이 된 마당에,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부를 구하거나, 남은 정적에 대한 원수갚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지혜로운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맡겨주신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부와 권력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헤아릴 줄 아는 마음과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바랐습니다. 통치자로서 이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선악을 분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미워하는 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이요, 백성들이 사랑하는 왕입니다. 이렇듯 솔로몬이 구할 만한 것을 구했기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와 총명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이런 솔로몬도, 사울과 다윗이 범한 같은 실수와 과정을 거칩니다. 성서의 이야기 속 성군은 영원히 성군으로 남아있지도 않습니다. 죄인이 영원히 죄인으로 남아있지도 않습니다. 성군이 폭군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타락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총명을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의 백성을 더 잘 섬기는 데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늘리는 데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일로 솔로몬은, 자기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먼저, 그는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즐겼습니다. 이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열 두 지방으로부터 많은 식량과 세금을 거둬들였고, 이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로, 솔로몬은 큰 규모의 건축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했습니다. 성전을 지었지만, 성전뿐만 아니라 자기와 부인들의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집착함으로써 살림살이에 지친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그들로부터 고혈을 쥐어짜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수많은 외국여인들을 궁정에 불러들이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허용했습니다. 이는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여러 모로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아내(후궁)700, 후궁()300명 있었다고 합니다(왕상 11:3). 과장된 숫자입니다만, 그가 초심을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후궁들과 함께 여러 곳에 우상숭배를 위한 산당을 지어 신앙적 구심력을 상실했습니다.

 

5.

 

솔로몬이 지혜와 총명의 왕 솔로몬이었던 시절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와 명예가 그의 일상이 되었을 때 그는 선대의 왕들처럼 타락과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화와 번영, 지혜와 총명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언제나 어디에서나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너나없이 세상의 질서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도 그 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내가 하는 이 일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리는 때때로 물어야 합니다. 길을 잃은 것 같을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에게 영광 돌리는 삶이 성서가 전하는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이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들에 핀)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6:29)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삶입니다. 일평생 이 길에서 떠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주간도 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