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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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희망

 

본문: 시편 84:1-12; 요한복음 6:56-69

설교: 홍정호 목사 (2018.8.26. 성령강림 후 제1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 때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등리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경강림 후 열 네 번째 주일이자 왕국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왕국절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날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늘에 속한 사람’(고전 15:48)으로, ‘영에 속한 사람’(고전 3:1)으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규정되는 라는 존재의 한계를, 하나님 안에 있는 더 크고 더 넓은 존재로 바꿔 나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차이를 넘어 선 보편성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나와 남을 가르는 여러 기준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왕 되시는 나라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차이들이 궁극적인 차이일 수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는 건 오늘 우리를 규정하는 세상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우리가 되기를 힘쓰며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꼭 같은 사람이 아니듯,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또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잃지 않고 살아야, 우리는 믿음 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삶을 위해서는, 오늘의 우리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더 큰 존재가 필요합니다. 아이에게 부모님이 그렇고, 학생에게 선생님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보지 못했던 은총의 선물들은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보게 될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8월 한 달간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양식이라는 주제가 네 번에 걸쳐 반복됐습니다(6:22-33; 34-40; 41-51; 52-29). 그 가운데에서도 35절은 6장의 요절이자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가 될 만한 구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생의 갈급함이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신 삶을 살아갈 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요한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여기까지는 지난 설교를 통해 반복해서 나눈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초점은 조금 다른 데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고, 주님을 모신 삶에 궁극적인 만족과 행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요한이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차례나 반복해서 설교하신, 복음서에서 이렇게 공들여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60), 이것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들은 이들, 심지어 제자라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첫 마디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제자들의 볼멘소리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겁니까, 아니면 받아들이기 어렵다(힘들다)는 겁니까? 둘 다 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데 힘이 실린 목소리 아니겠습니까? 안 된 말입니다만, 그들은 앞선 예수님 말씀도 다 이해해서 받아들인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 자기의 인간적인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분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않고 그냥 믿었던 것이죠. 말씀에 대한 숙고도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아멘으로 열광할 만한 그런 기적을 보여 주시거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육의 양식이 아닌 영의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바란 건 돌로 떡을 만드는 것,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기대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불평한 이들은, 군중이 떠난 자리에 남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뜻을 함께하겠다고 나선 이들 가운데 등 돌리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수군거리다, 스스로 실망해 등 돌리며 떠나버리는 거지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떠난 이들은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열성적으로 믿었던 이들이 자기의 기대가 크게 꺾이는 사건을 겪으면서 열성적인 반대자가 되듯이, 예수님에게 크게 실망한 이들은, 자기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는지를 돌아볼 마음도 없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며 그분의 적대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자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육의 양식에만 관심 있고, 영의 양식에는 관심 없는 제자들을 은근히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 말씀에 담긴 괄호를 풀면 이런 뜻 아닐까요? ‘너희들, 내 말이 불편하니? 그러면 만약 너희들 눈앞에서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런 기적을 보고서도 내가 한 말을 불편하다고 느끼겠니? 그러면 아이고, 주님, 믿습니다, 너희들 다 그럴 거 아니니? 그런데 내가 영의 양식에 대해 말하니 너희들이 어렵다고 수군거리는구나, 내 말이 어려운 거니,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거니?’

 

예수님을 찾아 온 이들마다 그분에게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 기대가 계속 충족된다면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분을 계속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대신 영의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고, 기대가 좌절된 이들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요한이 보여주는 장면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장면입니다.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 기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보다 나은 삶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대입니다. 지금보다 안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다 달라도 방향은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지금 생활이 잘 유지되기를 바라거나. 그런데 이런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인생은 없습니다. 굴곡은 있기 마련이고, 일희일비할 수 없는 일들이 늘 펼쳐지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의지했다말았다, 믿었다말았다 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먹는 육의 양식, 즉 음식은 우리의 몸을 만듭니다. 영의 양식은 우리의 영과 정신을 만듭니다. 그런데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육의 양식은 먹을수록 자기가 채워지고 자라지만, 영의 양식은 먹을수록 자기를 덜어내고 비워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제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노자(老子)의 한 구절입니다. 배움은 날로 늘리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평생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아니고, 앞선 존경하올 신앙의 스승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공부란, 위학일익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배움을 늘려 전문가가 되고, 아는 게 많아진다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앙공부에서는 위도일손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덜어내고, 비워내고, 자기를 여의는 훈련 없이 신앙공부는 늘지도 깊어지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 말씀하신 영의 양식은, 그러니까, 먹을수록 덜어내는 위도일손의 양식이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육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일은 경시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생활인으로 자기 직업에 충실한 이들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목표는 육의 양식을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움, 발전, 성장과 같은 가치들은 우리가 추구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가치들에 입각한 육의 양식으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워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위도일손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배우되 배울수록 겸손해지고, 경험하되 경험할수록 깊어지고, 채우되 채울수록 가벼워지는 역설을 지향하는 삶, 그것이 영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길을 알지 못합니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위도일손의 길, 영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여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파커 팔머(Parker J. Palmer)라는 미국의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팔순에 이르러 쓰신 에세이들을 최근에 읽는데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 하나를 소개드립니다. 젊은 시절 팔머 선생님은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의미 있는인생을 위해 노력하고, 강연을 할 때에도, ‘청중에게 뭔가 보여 주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서 강단에 서곤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열심히 준비한 강연임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실패의 쓴 맛을 뱉어내는 데 몇 주가 걸렸고, 시간이 지나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우연히 그 강연을 들었던 한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선생님 강연 덕분에 제가 가르치는 방법을 얼마나 바꿨는지, 그 변화가 저와 학생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를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더랍니다. 이 일 이후 팔머 선생님이 깨달은 것이 있답니다. “삶의 의미란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파커 J. 팔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2018, 37)

 

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도 그 의미를 우리가 정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자기의 입맛에 맞거나 기대에 충족되면 그날은 은혜 받은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지는 않습니까? 저도 젊은 목사라, ‘은혜 받는교인이 많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커서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팔머 선생님의 교훈은, 인생의 의미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일이 다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의미 있다고 느낀다 해서 우리가 바라는 그 의미가 거기에 꼭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다 생각한다고 해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담긴 의미를 규정하고, 그 한계를 우리가 정하기에 앞서, 말씀의 의미 앞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개방하는 것, 그것이 말씀 앞에 선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실망하고 돌아선 제자들은, 말씀의 의미를 자기가 쥐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 있게 느껴지는) 기적 앞에서는 열광하고, (의미 없게 생각되는) 영의 양식 앞에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과 제자들 다수가 당신 곁을 떠나시는 것을 경험하시고, 열 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듣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감동적이죠.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할 때 베드로는 주님께 위로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관계에서 예수님만큼 실패를 경험한 분도 드물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5천 명이 왔다가, 지금 열두 명 남았습니다. 성경을 보셔서 알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다 떠나고 혼자 남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아픔을 잘 아십니다. 주님이시오, 메시아시오, 왕이시오 고백하던 이들이 낯을 바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에도 주님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안고, 당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개신교회가 처한 현실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예외라는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까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현실 가운데에서, 누가 주님의 위로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외로움이 느껴지십니까?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런 시대에도 신앙을 떠나지 않고 주님의 기쁨이 되려는 이들이 한 줌의 희망입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목사로 살고, 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제가 예민한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앞서 인용한 파커 팔머의 말대로라면, 여전히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결정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의미는 좀 덜 생각하려고 합니다. 찾아 봐야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 해도 인간이 의미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이제는 더 많이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베드로의 고백을 좀 더 붙잡아야겠다, 다짐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의미를 묻지 않습니다. 의미를 물은 이들이 실망하고 떠난 주님의 곁을 그는 충실히 지켜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인은 이런 충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의미를 묻는 대신 의미이신 분 안에 거하며, 그분의 기쁨이 되는 일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의 양식으로 충만한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