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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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공경

 

본문: 시편 46:1-11; 마가복음 7:1-8,14-15

설교: 홍정호 목사 (2018.9.2. 성령강림 후 제15)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빚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본문은 앞선 마가복음 223절 이하에 나오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의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2장과 7장 모두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전통과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부정한 행위를 빌미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질문들을 던지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정죄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할 명분을 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1.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앞선 56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6:56)고 전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그분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 치유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어디에 들어가시든지사람들의 치유자가 되신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묵상했습니다. 대개 농촌에서 환영받는 사람은 도시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땅에 잇대러 살아가는 훌륭한 농부가 훌륭한 도시 직장인이 되기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도시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은, 농촌생활에서는 그야말로 아기나 다름없이 무력합니다. 지금 김매러 밭에 나가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분들이 더러 계시겠습니다만, 대개는 얼마 못가 아이고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생활의 구조 혹은 문화가 다른 두 장소에서 동시에 환영받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도시와 농촌 간 차이라는 공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생활공간에서도 이런 장소에 따른 수용과 배제의 논리는 작동합니다. 여기에서 박수 받을 얘기가 다른 데에서는 비난 받을 얘기가 되고, 반대로, 다른 데서는 인정받지 못할 얘기가 여기에서는 인정을 받는, 이러한 장소에 따른 차이를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 속에서 예수님은,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의 치유자가 되셨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을 통합해 내시는 능력, 그 사람의 지금 생각이 어떤지가 아니라, 그의 중심을 보시는 시선, 이런 근원적인 사랑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고, 장벽을 허물어 하나님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화해와 통합의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힘의 근원이 무한한 사랑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화해와 통합의 능력이 당대의 지도자라 일컬어지는 바리새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장소 안에서, 특정한 무리 안에서 환영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들은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적대자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율법의 지배력이 작용하는 공간(성전, 회당, 혹은 율법중심체제) 속에서 그들은 선생이요, 지도자로 추앙받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선 다른 장소에서, 율법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그들은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율법의 지배력이 미치는 장소를 끝없이 확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용되는 법칙이 저기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장소의 특이성을 제거하고, 이건 원래이런 것이다, 혹은 원래이런 게 아니다 하면서 그들 자신의 말과 경험을 보편으로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국주의의 지배방식을 취하지 않으시면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시고, 모든 겸손한 이들의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기적이라고 말해야 할 이런 놀라운 일, 서로 다른 이들을 사랑 안에 일치로 이끌어내시는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신 겁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와서 한 비난의 구체적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저희 집에 경찰이 있습니다. 어린이 경찰입니다. 제가 간혹 식사기도를 안 하는 것 같으면 안보는 듯 보고 있다가 그럽니다. ‘아빠 왜 기도 안 해’. 그러면 여러분 뭐라고 하세요? 저는 , 속으로 했어그럽니다. 애들한테는 꼭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의 문법이 완성되는 것이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당대의 스승이었는지는 몰라도, 영적인 면에서는 미숙한 존재들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대원칙을 잊고,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밥 먹을 때 손 씻고 먹는지 안 씻고 먹는지가 그들 관심의 전부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보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예수님 일행에게서 !’ 일어난 겁니다. 그렇습니다. ! 일어났습니다. 한두 번이면 어떻게 눈감고 넘어가겠는데,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걸 그들로서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법(purity law)은 일상에서 거룩함, 즉 구별된 삶을 위해 지켜야 할 생활규칙들을 세세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결법의 문제는, 그 엄격한 율법의 기준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이 특정 계층, 성직자나 귀족 등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율법을 읽을 줄 모르거나, 들어서 알더라도 생활 가운데 다 지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 부정함을 씻고 먹어야한다는 규례도 그렇습니다. 오늘날이야 손 씻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물을 구하기 힘든 시대에 바깥일 하는 중에 잠시 밥 먹자고 손을 씻으러 간다거나, 하던 일을 중단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손을 씻을 필요가 있는 이들은 밖에서 흙과 더불어 노동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손을 씻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굳이 손을 씻지 않아도 되는 이들, 손에 더러운 것 묻힐 일 별로 없는 이들이, 정결법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손을 씻을 수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거룩한 우리와 부정한 그들을 나누고, 부정한 그이들에 대해 계속해서 선생 노릇을 할 명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을 떠난 제도로서의 종교가 지속되고 있는 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결법을 강조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앞서 주님은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어디에서든 치유자가 되셨다고 말했습니다만,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겸손한 이들의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요? 높은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할 예우를 다하는 것이 겸손입니까? 그것도 겸손의 한 모양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겸손은 보다 근원적 태도를 말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낮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3.

 

겸손을 뜻하는 라틴어는 후밀리타스’(humilitas)입니다. ‘후밀리타스는 땅()을 의미하는 라틴 낱말 후무스’(hum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후무스는 땅(대지)을 가까이하는 마음자세, '땅성'(earthiness)을 의미합니다(김순현, “신성의 겨냥을 받는 대지,” <기독교세계>, 1039, 44.). 그러니까 후밀리타스’, 겸손이란, 땅을 가까이하는 마음자세, 혹은 땅에 가까이 있는 이들을 대하는 마음자세를 뜻합니다. 땅에 가까운 이들, 남들보다 아래에서 엎드린 채 살아가는 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복음이 말하는 겸손의 참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행동을 위선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들 거룩한 이들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비난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공경,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땅에 엎드려 살아가는 존재들을 경멸하는 그들의 거룩함이 한낱 위선에 불과한 것임을 아셨습니다. 여기에 공경이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헬라어로는 티마오’(τιμω)라는 낱말인데, 이 낱말은 히브리어 카바드’(כבד)의 번역어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할 때 사용된 낱말이 바로 카바드입니다. 카바드에는 무겁게 여기다’, ‘영화롭게 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무겁게 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하나님 공경하는 듯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이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보셨던 겁니다. “입술로는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으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그분을 입술로 공경하는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율법을 중시하고 나름 거룩한 삶에 힘쓰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모진 말씀을 하신 걸까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거룩함이 후밀리타스의 정신, 즉 땅의 사람들, 민중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거룩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룩함, 그런 하나님 공경이란, 예수님 보시기에 한낱 기만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복음은 이 관점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의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4.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어떤 이가 있었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오늘 내 모습을 보여주마.’ 응답을 받은 그는 하루 종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초대하지 않은 이들, 멸시할 만하고 경멸할 만한 이들의 방문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한 거지가 동냥하러 왔기에 내쫓았습니다. 한 소녀가 성냥을 팔러 왔기에 거절했습니다. 한 술주정뱅이가 집 앞을 지나다 비틀대며 쓰러졌기에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주시기로 한 그날이 지났습니다. 그는 절망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너를 세 번 찾아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네가 나를 모욕했다.”(장의준, “거지 하나님-신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모욕할 것인가?,” <기독교세계>, 1042, 70, 자유롭게 인용)

 

거지를 모욕하지 마라. 하나님은 그의 편이다.” 유대교의 격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공경은, 낮은 이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겸손한 사람, 시선이 땅/아래를 향해 있는 자만이 그분을 참으로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입술로 공경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속내를 숨긴 채 간사한 말 몇 마디로 그분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그분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심입니까? 후밀리타스, 낮은 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겸손이 그분이 보시는 중심입니다. 이 겸손을 잃어버릴 때 종교는 한낱 제도에 불과한 것이 되고, 종교적 열심은 위선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나라를 열망할 때 복음은 제도의 한계를 뛰어 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드는 역동적인 변화의 힘이 됩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매주일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얻기 바라십니까.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세상의 걱정근심을 잠시 내려놓는 평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우리가 정말로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참으로 겸손하신 분, 그 마음을 낮추고 낮춰서 세상 가장 작은이들의 친구가 되신 분, 그분의 마음을 닮으려는 열망이 매주일 드리는 예배의 목적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입니까? 땅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시선이 낮은 곳을 향해 있고, 낮은 이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보배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이 한 주간도 겸손하신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운데, 참으로 그분을 공경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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