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44 댓글 0

한 여인의 믿음

 

본문: 시편 125:1-5; 마가복음 7:24-30

설교: 홍정호 목사 (2018.9.9. 성령강림 후 제16)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구합니다. 마가는 그 여인이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라고 전합니다. 시로페니키아는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인데, 페니키아인들의 가나안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는 이 여인을 가나안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는 인종적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유대사회에서, 그리스계 사람으로서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문화적 혼종성을 지닌 이 여인이, 종교문화적으로 그 존재가 부정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시로페니키아라는 지역을 특정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은 여성입니다. 이방인에다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오늘 복음의 주인공이 처해 있는 취약한 상태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마가와 마태가 전하고 있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에 관한 복음은,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 가운데에서도 난해한 본문에 속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저는 오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오가며 설교하고자 합니다.) 병든 딸을 둔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여인의 외침을 들으시고서도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여인을 에 비유하며 모욕하셨고, 이로써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과 행동으로부터 거리가 먼, 인종주의적 편견을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실망스럽습니다.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유대인에다 남성이었기 때문일까요. 절박한 마음을 안고 찾아 온 여인을 이렇게 외면하고 모욕하셔야만 했을까요.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지만, 그것은 이 이방 여인이 많은 이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그것을 감내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인 뒤에야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왜 이런 방식을 취하셨을까요. 오늘은 한 여인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공동체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도,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개인의 이른바 주체성이 중시되는 서양의 근대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이 급속한 근대화과정을 거치며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무너진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서 이해의 전제로서 공동체의 중요성은 종종 간과되곤 합니다.

 

공동체는,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든 친목모임이든지 간에, 거기에 속한 이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한 마디로, 서로 닮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차이가 있고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밖에서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하니까 함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그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공유하는 어떤 생각이나 정서를 직접적으로 거슬러 말하고 행동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왜곡되고 잘못된 한낱 편견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공동체가 공유하는 정서나 생각이 있다면, 일단 그것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를 위한 발돋움이 시작됩니다. 물론 공동체가 공유하는 생각이 할지라도 남의 말을 듣고 생각이 교정되는 경우가 생길 수는 있습니다. 정말 어쩌다, 기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변화는 스스로 이게 아닌데하고 깨닫게 될 때, 그런 계기를 맞이해서 자기를 성찰하고 돌이키게 되면서, 자기 안으로부터 일어납니다. , 이것이 제가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의 시작입니다.

 

앞서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 이해에 있어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 여인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에 대해 듣고 보고 배웠지만,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들이 있었고, 그들 스스로는 그 한계를 인지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그 편견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여성에 대한 남성중심주의적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입니다. 그들은,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일구기 위해 나선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공유하는 이방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지닌 편견을 일단 존중하시는 전략을 취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략입니다. ‘너희와 나는 생각이 다르지 않아,’ 일단 이렇게 시작을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도 혼자 일 하실 수 없는 마당에 측근이라 할 제자들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편견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이 이방 여인에게 보임으로써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화적 정서를 일단 긍정하는 전략을 취하고 계시는 겁니다.

 

3.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방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였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이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이방 여인의 절박한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찾아 온 여인의 첫 마디는, 마태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15:22)였습니다.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데, 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했을까요? 딸은 자기로 인해 어머니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괴로움은 모두 어머니의 몫입니다. 병든 딸을 돌보면서 이 여인은 몸도 마음도 모두 상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는 여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을 읽어내셨고, 이를 통해 이 여인의 개인적 고통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편견과 왜곡된 태도를 교정하는 계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멀리서 당신을 찾아 온 이 여인이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으시면서, 이 여인을 도울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남성중심적, 인종주의적 편견을 교정할 기회로 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인 말씀을 통해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그러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던 그 차별적 시선을 그대로 노출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뜨악했을 겁니다. 게다가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와 간청하는 연약한 한 여인에게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제자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연약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분의 날선 비판은 언제나 교만한 자들, 스스로 높다는 자들을 향하고 있었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 아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인을 에 비유하시다니, 여러분이 그 자리에 계셨다면 어떠셨을까요. 정말 당혹스럽지 않았을까요. 평소 약자들에게 연민과 사랑으로 일관하던 어느 분이, 특정 지역 출신인 사람을 향해서, 특정 계층에 속한 사람에게,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 발언을 적나라하게 하는 것을 곁에서 듣고 있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요새말로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그런 것이겠죠. 예수님이 지금 그러고 계시는 겁니다. 이 낯선 광경을 마주하면서, 제자들은 가만있어봐, 이거 뭔가 이상하네. 내 생각하고 똑같아서 좋긴 한데, 예수님에게서 저 말을 들으니까 뭔가 이상하네.’ 이런 자기 물음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결정타가 날아갑니다. 이 여인이 보인 반응입니다. 이 겸손한 여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빠지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런 걸 좀 어려운 말로, 메타-언어적(meta-linguistic) 대화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나, 이 여인이나, 지금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면에 통하고 있는 깊은 사랑과 신뢰에 역점을 둔 말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절박함이 당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아셨고, 이 여인은 예수님의 모진 말이 본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편견을 드러내심으로써 그것을 교정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난 주 부흥회에 참석했다 선배 목사님들과 식탁 담화를 나누면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사모님이 당시 전도사님이었던 목사님에게 반해 결혼하신 이야기인데, 연애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전도사님이 집회에서 오랫동안 꼼짝 않고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에 반해서 - 반하려면 이런 모습에도 반한다는 사실! - 혼자 좋아하셨답니다, 그 사모님이. 그런데 다른 청년들도 그 전도사님을 좋아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앞장서서 온갖 비방을 늘어놓으셨다는 거지요. 키가 작다부터해서, 어떻다 저떻다, 듣는 이들이 저이가 왜 저러나싶을 만큼 전도사님에 대한 거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이른바 경쟁자를 쫓아버리셨답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같이 있던 여자 청년들에게 말했답니다. 나 전도사님하고 결혼해. 뜨악하죠. 사모님 말씀이,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셔서 저희가 다 웃었습니다. 말하자면 메타-언어적 차원의 소통이란 이런 것입니다. 들리는 말, 겉으로 내뱉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의 이면적 차원이 더 중요한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사이에는 이런 메타-언어적 차원의 신뢰와 소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곳에서와 확연히 다른 예수님의 이 혐오발언을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은, 모진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며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이 여인 겸손을 제자들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유대인이요 남성이라는 그 사회의 특권적 지위를 누리면서도, 자기를 긍정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하나 없다는 불평에 가득 차 누가 자기를 조금이라고 비난할라 치면 언제든 다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렇게 왜소해진 영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예수님의 주변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적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인정을 위한 비교의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저 부정한 이방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저 가난한 과부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너는 세리와 다르지 않다, 혹은 너보다 세리가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거나, 너는 이방인과 다름없이 죄인이다, 오히려 이방인이 너보다 의롭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분노에 차 다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 앞에 나타난 이 여인의 믿음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모두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로 낮추며 모욕하는 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겸손을 잃지 않는 이 여인의 모습에 유대인이요 남성이라는 기득권적 세계에 살고 있던 이들이 오히려 흔들렸습니다. 이 작은 여인은 유대인 남성들의 편견을 부정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편견을 긍정함으로써 그것이 한낱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드러내 그 말을 하는 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기막힌 반격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시면서도 그를 변화를 향해 이끌어가시는 방법이며, 이 여인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신 이유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15: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대답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봅니다. 참된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이의 능력이나 탁월함에 대한 선택적 긍정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과 신뢰를 뜻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그분의 말에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일들에 일희일비하면서,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의심하고 탐색하는 존재에 머물 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안다면, 그리고 그분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는 주님하고, 저럴 때는 등 돌리는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방 여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중심에 가 닿음으로 구원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방 여인처럼 어떤 문제 앞에 있는 분들이 여기에도 계실 줄 압니다. 주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부흥사같이 말해서, 우리 교인들은 신뢰가 안 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안 보이는 길을 보게 하시는 분이시며, 보면서도 주저하여 못 가는 길을 가게 하시는 분이시며, 문제의 크기에 짓눌려 어찌할 바 모르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그분이 보이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겠다는 다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작은 여인처럼, 세상에서 멸치와 천대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으로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큰일을 이루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이 믿음 가지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13 한나의 기도 (2018.11.18.) 홍목사 2018.11.18 7
812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 (2018.11.11.) 홍목사 2018.11.11 17
811 하느님께 감사 (2018.11.4. 추수감사주일) 이계준 2018.11.05 27
810 눈뜬 신앙인 (2018.10.28. 종교개혁주일) 홍목사 2018.10.28 22
809 제자의 자리 (2018.10.21.) 홍목사 2018.10.21 28
808 삼잘신앙 (2018.10.14. 가을철 야외예배) 홍목사 2018.10.15 26
807 화해의 주님 (2018.10.7.) 홍목사 2018.10.07 40
806 쏠티 크리스천 (2018.10.7. 림학춘 목사님 설교) 신반포 2018.10.02 30
805 인생을 산다는 것 (2018.9.23.) 이원로 2018.09.26 60
804 말과 성사(聖事) (2018.9.16.) 홍목사 2018.09.16 52
» 한 여인의 믿음 (2018.9.9.) 홍목사 2018.09.09 44
802 참된 공경 (2018.9.2.) 홍목사 2018.09.02 37
801 한 줌의 희망 (2018.8.26.) 홍목사 2018.08.26 48
800 솔로몬의 간청 (2018.8.19.) 홍목사 2018.08.19 63
799 이끄시는 하나님 (2018.8.12.) 홍목사 2018.08.12 54
798 생명의 빵 (2018.8.5.) 홍목사 2018.08.05 50
797 하나님을 찾는 사람 (2018.7.29.) 홍목사 2018.07.29 51
796 양과 목자 (2018.7.22.) 홍목사 2018.07.22 55
795 그리스도 안에서 (2018.7.15.) 홍목사 2018.07.15 40
794 반석 위에 지은 집 (2018.7.8.) 이원로 2018.07.09 5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1 Next
/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