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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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성사(聖事)

 

본문: 잠언 1:20-33; 야고보서 3:1-12

설교: 홍정호 목사 (2018.9.16. 성령강림 후 제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닙니다.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1:22)고 말합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이가 있는데 그에게 가서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잘 먹고 다니세요이렇게 말하면서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2:17)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선행)의 가치를 신학적으로 구분하고, 관념적 믿음과 확신을 강조해 온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 의해 오랫동안 덜 중요한 본문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를 뒤집어서 반대로 말합니다. 224절에서 야고보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4)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하고,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충돌하는 강조점으로 인해서 신학과 신앙실천의 방향은, 믿음에 강조점을 둔 신앙과 행함에 강조점을 둔 신앙 두 개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여 한쪽만 강조하는 것이 건강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은 구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할 때 그 안에는 이미 행함의 중요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할 때 그 안에는 이미 믿음의 중요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과 행함 가운데 무엇을 강조하든지 간에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지배적 견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행함 가운데서도 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

 

야고보는 119~20절과 26절에서 이미 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야고보는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1:19)라고 권면하고,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1:26)라고 질책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1:27)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믿음보다는 행함, 말보다 선행을 중시한 야고보가 오늘 본문을 말의 중요성에 대해 재차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 안에서 말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대부분 말로 인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기도 합니다. 대개의 경우 선생이 잘 해야지 학생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교회에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데, 이렇게 말하면 억울한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이 된다는 건 불공평한 책임을 떠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돌봄과 희생 없이 자란 생명이 없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 정신적인 성숙에 있어서도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선생의 역할은 지식이나 경험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배우는 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야고보의 말처럼,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말과 행실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더 높은 도덕적 의식과 행동이 선생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근대 전문가들의 사회는, 선생으로부터 이런 도덕적 부담을 말끔히 지워내 버렸습니다. 제가 신학 공부하는 분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의사를 찾아간다고 할 때 성격이 참 따뜻하고 좋은데 오진을 밥 먹듯이 하고, 수술만 하면 사고가 나는 그런 의사를 찾아가겠어요, 아니면 성격이 아주 까칠하고 나를 거의 사물로 대하는데, 최고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춘 명의를 찾아가 병을 고치겠어요?” 또 이렇게도 묻습니다. “비참한 삶을 사는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가 좋으세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가수의 비참한 노래가 좋으세요?”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사회, 근대의 합리주의적 세계 속에서 선생이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책임을 벗어던진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시대에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실력이지 도덕성이나 인격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겸비되면 훌륭하겠지만, 근본 자격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문제가 이렇다면, 신학 전문가, 목회 전문가, 설교 전문가는 어떻습니까? 신학적인 지식이 많아도 그는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역할이란, 좋은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하는 것에 머뭅니다. 그것이 신학대학의 전문 신학자들의 역할입니다. 설교 전문가는 어떻습니까? 청중을 감화시키는 설교의 달인이라 할지라도, 각종 수사학적 테크닉으로 구성된 훌륭한 설교가 그 설교를 하는 이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한 마디로, 앎과 삶을 분리하고, 인식과 실천을 분리해 온 서양이 근대정신이 전문가를 만들고, 하나님과 신앙문제에 있어서도 신학전문가, 설교전문가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앎과 삶이 하나인 선생, 야고보의 말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큰 책임감과 두려움을 안고 말하는 이를 찾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서양에서도 앎과 삶, ()과 행()이 처음부터 이렇게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 근대정신의 유산입니다. 일전에 설교를 통해 키케로(Cicero)의무론에 등장하는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라는 사람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이 사람은 전쟁에 나갔다가 적국 카르타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적국의 포로가 된 레굴루스는 자신이 본국 로마로 돌아가 포로상환 협상을 시도해 보고, 실패하면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와 죽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말을 믿고 풀려난 레굴루스는 로마로 돌아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레굴루스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기왕 풀려나 본국으로 왔으니 여기서 잘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적국 카르타고로 돌아가 그곳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습니다. 키케로는 레굴루스의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극찬합니다. 그가 약속을 수행함에 있어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신의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적과 맺은 약속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명예를 건 맹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맹세를 어기는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 그것이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말하는 신의(信義)의 내용입니다. 누구와 약속을 했든, 비록 해적과 같은 이와 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명예와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키케로가 레굴루스의 용기와 신념을 칭찬하는 이유입니다(홍정호, “선물이 된 사람,” 신반포감리교회 주일설교, 2016.1.10.재인용).

 

키케로가 전하는 레굴루스의 이야기에서처럼, 서양에서도 언()과 행()의 일치는 신념과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 사이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과 행실의 일치에 대한 강조, 때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으로 간주되어 온 말에 대한 책임을 우리시대에 찾아보기란 참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되도록 적게, 그러나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동서양의 전통을 가로지르는 교훈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인정하는 바입니다만,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야고보는,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3:2)이라고 했습니다. 몸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혀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절망에 빠지게도 만들고 새 힘을 주기고 하는 것은, 몸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141:3)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려면, 곧 말이 성사(聖事)가 되게 하려면, 입술을 지키고 조심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밝히는 것처럼,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를 겸비한 화술의 달인이 된다고 해서 말이 성사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사의 핵심은 존재의 변화(metamorphosis)에 있습니다. ‘메타모르포시스란 외형만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말이 성사가 되려면, 말을 치장하고 말이 바뀐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말 하는 이가 변해야 합니다. 말 하는 이의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그의 말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의 성사,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6:45)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말 하는 이의 존재의 변화야말로 예수님과 야고보의 관심이었습니다.

 

4.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바른 말을 하시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잘 못합니다. 다만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는 야고보의 권면을 전해드립니다. 말을 다스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말은 빠르고, 행동은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참된 예술의 쓸모가 그 쓸모없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 또한 그것이 실현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현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과 삶이 일치된 삶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은 그렇기에 맹세가 사라지고, 말과 삶이 분리된 전문가의 시대에도 우리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권면 드립니다. 말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으로 나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오늘을 만든 것은 어제까지의 나이지만, 나의 내일을 만드는 것도 오늘의 나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참 사랑이신 분 안에서 변화할 때 멀게만 느껴지던 우리의 믿음과 행함, 그리고 말과 행실의 거리는 날로 좁아지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 존재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며 말의 주인으로, 성사가 되는 참말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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