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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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산다는 것

 

본문: 마태 8:18-27, 고전 1:26-31

설교: 이계준 목사 (2018.9.23.)

 

우리는 예수께서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맨 처음에 기록된 것이 마가복음이고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자료들을 인용한 것입니다. 꼭 같은 이야기가 세 복음서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들이 같은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그 초점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신대에서 은퇴한 성서학자 김득중 교수는 근자에 펴낸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라는 책에서 세 복음서의 본문과 문맥을 연결하여 읽으면 기자들이 같은 내용을 다른 목적을 위해 기술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text)과 문맥(context)을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을 신학에서는 상관관계의 방법(method of co-relation)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복음서 기자인 마가는 본래 이 말씀을 로마제국의 박해로 시달리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념을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것을 예수의 초월적 능력에 초점을 맞췄는가 하면 마태는 제자 직()과 연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마태가 풍랑 이야기 바로 앞에 기록한 두 가지 제자 직에 관한 이야기를 미루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8:18-20에서 어떤 율법학자가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고 할 때 예수께서는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고 8:21-22에서는 제자 하나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고 할 때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마태는 마가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 직과 연계시킨 것이 확실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마태는 마가에게서 풍랑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율법학자와 제자 가 예수를 쫓겠다는 고백과 연결시킨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노도광풍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두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참 제자가 되고 영원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첫째 장애물은 재물입니다.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께서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것은 집 다시 말해서 세상의 재물과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관 곧 부귀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것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자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의식주가 불가피하고 특히 현대인은 생활수준에 따라 품격과 신분이 결정되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품위를 유지하며 살려면 재물에 무관심할 수 없고 우리가 진정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초점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우선순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재물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창조물과 재산이기 때문에 그것을 절대시하거나 우상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용할 일용품으로 주신 것이므로 인생순례에서 나와 가족과 이웃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일종의 값진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의 물질에 대한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적 풍조는 우리가 예수의 제자 직을 수행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의 사회는 물론 독재주의 사회도 그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모두가 물질제일주의 곧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란 장애물을 극복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나와 이웃이 함께 어울리는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방향전환은 우리를 세속주의의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현존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유인으로 격상시켜주는 것입니다.

신문기자 송혜진 씨는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인터뷰한 것을 책으로 엮었는데 처음에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자였던 이나가키 에미코 씨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유명 신문사 기자이었지만 자기가 월급의 노예라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퇴직을 계획합니다. 씀씀이를 최소화하고 저축을 극대화하여 50세에 퇴직하고 도시 외곽 단칸방에서 가전제품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작은 마트나 빵 가계를 이용하면서 좋은 물건을 이웃과 나누는 소박하고 청렴한 삶 속에서 인생의 진미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6.25 당시 중공군의 침공으로 피난하게 될 때 제 어머니는 집과 월동 준비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에 남겠다고 고집하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기에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겠다고 자리에 앉아버렸더니 어머니는 마지못해 떠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재물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정은 이산가족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가치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욕망이란 파고가 위협하는 세계 속에서 욕망과 청빈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이 골고다 같은 세상에서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 곧 소박함과 청빈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구원 곧 영적 해방에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 장애물은 결단입니다. 한 제자가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세속의 일을 부정하고 단절하는 단호한 결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가 부친상을 당했는데 장례를 치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임에도 그렇게 극단적인 결단을 요구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개인적 및 인간적 사연을 극복하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인생은 한 마디로 날마다 순간마다 결단의 연속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원초적으로 삶을 위한 결단이고 궁극적으로는 사람 되기 위한 결단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의 음성 곧 양심의 소리를 듣고 바른 판단에 따라 결단해야 인간의 정체성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 되고 주님의 제자 되는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소설가 공지영 씨의 근작 <해리>는 한 장애인 복지시설을 무대로 벌어지는 부정과 불의의 사회구조 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좌파 문인의 대변자인 작가는 정의의 이름으로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386세대 정치인들과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서약한 가톨릭 신부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행하는 횡령과 위선, 허위와 살인 등 온갖 스캔들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 욕망과 구조 악 때문에 바르게 결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난여름 여성 통계청장이 정권에 유리하게 통계를 조작하도록 강요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결단하므로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권력은 그녀의 직업과 지위를 빼앗아갔지만 그녀의 고고한 주체성은 건재했고 오히려 한 순간에 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큰 별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퇴임식에서 흘린 눈물은 권력자들의 무지 목매와 장래 국가적 재난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자기 구원과 승리에 대한 감격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손실과 위험을 초래하겠지만 인간으로 또한 주님의 제자로 주체성을 지니는 구원의 길입니다. 저는 기독교대학의 이념인 진리와 자유를 고수하다가 군사정권에 해직된 경험을 통해 이런 확신을 얻었고 그 용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공지영 씨의 소설에서 암환자인 노 여류화가가 한 말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간의 종말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함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예수처럼 성숙한 인간이 되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의 종말 곧 세속적 풍조와 단절하고 초월적 차원의 삶을 위해 결단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이념의 좌우를 떠나 삶과 죽음, 핵의 노예와 자유인, 3류 국가시민과 선진국시민 등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후세들의 영고성쇠를 좌우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국민으로써, 예수의 제자로써 이 위기에 대한 자각과 결단과 헌신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이 역사적 사명에 응답하는 것이고 여기에 진정한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