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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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신앙인

 

본문: 시편 34:1-8; 마가복음 10:46-52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0.28. 성령강림 후 제23, 종교개혁주일)

 

[그들은 여리고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1031,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이, 부패한 당대 교회의 개혁과 더불어 개인양심자유에 관한 근대정신의 포문을 연 지 501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

 

루터는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에서 중세 가톨릭교회가 높이 쌓아올린 세 개의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담장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 역할이 구분될 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서해석의 최종권한이 교황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담장입니다. 루터는 성서를 해석하기는커녕 읽을 수도 없었던 이들을 위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신자들이 직접 성서를 읽고, 성직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는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습니다. 셋째는, 공의회의 소집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고 가르치는 담장입니다. 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을 전통의 이름으로 지속시키는 공의회에 대항하는 새로운 모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넘어 중세의 정신과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근대로 향하는 정신사적 전환을 이뤄냈습니다.

 

개인의 양심과 자유, 루터로부터 촉발된 근대의 유산을 정리하자면 이 세 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집단의 일원이 아닌 개인’, 전통과 법에 앞선 양심’, 그리고 권위에 대한 순종에 우선하는 자유’, 이것이 서양이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넘도록 발전시켜 온 자유주의 정신의 요체입니다. 루터가 허물어야한다고 말했던 세 개의 담장은, 개인의 양심과 자유를 향한 역사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었습니다. 이것은 비유럽세계에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근대화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루터를 알든 모르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의 종교개혁이 남긴 시대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개인의 양심과 자유라는 자유주의 정신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루터의 시대와 달리, 우리시대의 과제는 개인의 탄생이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성의 회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세대, 세계가 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자란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공동체성의 학습하는 것입니다. 또한 양심과 자유에 관한 주장도 정의공공성이라는 맥락에서 조율 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열 사람이 모여 열 개의 서로 다른 양심을 주장하며 자기 양심이 옳다고 다투는 마당에 교황과 공의회와 같은, 루터가 허물어버려야 한다고 했던 도덕적 권위의 귀환이, 중세시대와 같은 모양은 아니겠지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되새기는 것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추억하는 것을 넘어, 멈추지 않는 개혁을 향하여 오늘의 과제를 잘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2.

 

오늘 본문은 눈먼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마가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앞선 17절 이하의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병치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는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과 바디매오의 대조되는 반응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여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반면, 눈을 뜬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부자청년 이야기의 결론은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이고, 바디매오 이야기의 결론은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지만, 한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다른 한 사람은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게 된 상황을 마가는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대비되는 반응을 보였는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말 그대로 가진 것이 많아,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에는 버리고 정리해야 할 게 너무 많아 근심하고 돌아선 것이고, 바디매오는, 버릴 것이라고는 자기 이름밖에는 남아 있지 않은, 눈먼 거지였기 때문이겠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가 누구였는지를 읽는 이들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서는, 밝은 눈으로 읽는다면, 그 어떤 책보다도 전복적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시는 모든 과정에서, 그분은 사회적 약자들, 주변부에 속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 소식은, 들판에서 밤늦도록 일하는 목동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이었지만, 헤롯 왕과 그 권세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유아를 살해하려는 헤롯의 폭정을 피해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난민과 다름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성인이 되시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도 예수님은, 당대의 지도자라라는 이들보다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환영받으시고, 그들의 주님으로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또 어떻습니까? 그분의 시신을 수습하러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아 온 이들은 그분이 아끼시고 사랑한 남성 수제자들이 아닌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고통과 눈물의 땅 갈릴리에 가 계셨습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그분이 누구와 함께 하셨고, 누구에게 환영을 받았는지, 반면에 누가 그분을 미워했고, 누가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증언합니다. 오늘 부자 청년과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대조하여 전하는 마가 역시, 이러한 복음서의 서사 구조를 큰 틀에서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떠난사람과 그분을 따른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말씀 드린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향해 눈뜬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갈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다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눈먼 거지라는 사회적 위치는, 그러기에 용이한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곤고한 자리에 있다고 해서 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곤고할수록 더 완강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버릴 것이라고는, 이제 자기의 알량한 자존심밖에 남아 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바디매오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분께 구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바디매오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했고, 주님께 구했습니다.

 

반면 부자 청년은 어떻습니까? 그는 주님에게 자비를 구하는 대신 질문을 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 “무엇을 해야합니까?” 하는 질문을 곱씹어 보십시오. “제가 이것도 잘 했고, 저것도 잘 했는데, 그런데도 영원한 생명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얼 더 해야합니까?” 이 청년의 질문 속에는 자신감이 배어있습니다. ‘내가 원하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나는 할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고 주님에게 질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청년의 자신감을 단번에 깨버리고,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런 청년에 비해 바디매오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의 방식부터가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께 질문을 하는 대신 자비를 구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했습니다.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주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셔도 저는 힘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바디매오의 간청에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서(9:22), 나병에 걸린 사마리아 사람을 고치시고서(17:19),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향해(7:50)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든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이는, 그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은총의 힘을 믿는 자,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힘을 믿고 행하는 자, 구원은 그에게 허락되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4.

 

오늘 우리는 또 한 번의 종교개혁주일을 보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개신교의 근본정신이 또 하나의 교리가 되어 우리의 신앙을 옥죄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시대에 정말로 은혜로만구원받을 이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시대에 화석화 된 제도와 교리를 넘어 되새기고 따라야할 오직 성서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돈의 힘, 권력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으로만구원받는다고 선포한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다시금 진리에 눈뜬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500년 전 역사적 사건으로 두지 말고, 오늘의 구원을 위한 이정표로 삼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생명의 말씀이 아니면, 그리고 믿음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과 더불어 열리는 하나님나라의 꿈을 되새기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누군가에게 자비와 은총의 선물이 되는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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