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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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찬양하는 사람

 

본문: 시편 146:1-10; 마가복음 12:38-44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1.11. 성령강림 후 제25)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8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두 주일만 더 보내면,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여선교회 헌신예배일이기도 합니다. 담임목회를 시작한 이후 저를 가장 헌신적으로 돕고 계신 분들이 우리교회 여선교회원들입니다. 오전으로 예배시간을 변경하게 되면서 매주일 공동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교회의 연중행사들을 여선교회가 분담하여 다 챙기고, 이에 더해 헌금을 모아 외부 선교비를 보내고 구제하는 일에도 힘쓰는 여선교회 덕분에 목회를 하는 데 있어 때때로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오늘을 빌어 우리 여선교회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에 앞서, 예수님은 28절 이하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던진 율법학자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올무에 걸려들게 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 ,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 질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의 인생의 숙제죠.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 율법학자들의 올무를 예수님은 슬기롭게 벗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계명의 큰 줄기를 두 개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낱말을 꼽는다면,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의 한 길로 정진하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신앙에 몸담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룬 모든 계명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율법학자들 가운데도 사랑하라는 명령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우리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율법의 요체임을 율법학자들인 그들도 알았고, 우리도 알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는 해석에서 출현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합니다만,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제각각입니다. 전통 기독교신학은 인간의 에 주목했습니다. 신학적 의미의 는 규범을 위반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히는 데서 오는 형법적 개념을 말한다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르게 된 결론의 성격을 지닙니다. 사도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고백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탄식했습니다(7:22-2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열린 존재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urvatus in se)의 상태를 스스로 면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의 모습에서 인간의 죄성을 보았습니다. 루터는 어떻습니까?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한 자각이, 오직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지려는 힘, 그것이 이들 신학자들이 발견한 인간의 죄된 본성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고상하게 말해서 자기중심성입니다만, 실상은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저는 현대의 해체주의적 경향 아래 신학적 사고의 힘을 키워 왔습니다. 전통신학의 주제인 본성이니 하는 말들은, 저의 익숙한 사유의 틀에서는,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중에 대한 통치를 지속하기 위해 발명된 통치의 기술’(art of governing)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몇 해 전부터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죄인으로 규정해 온 전통신학의 인간론이 단지 통치의 기술이 아니라, 내면의 성격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통찰의 결과라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과 때때로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확증편향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자주 접합니다. 어떤 선입관을 수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합하여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종교 자체를 확증편향의 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견해 또한 확증편향이라는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버리고 마는 인간의 이러한 자기중심성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현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인간학이 절망적으로 마주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3.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문제로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들은 단지 학자일 뿐이고 누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정당화의 논리로 무장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 어떤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율법의 논리로 정당화가 가능한 사람들, 그래서 웬만해서는 율법의 체계 내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일이 없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슨 말이든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해석하고 주장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의 전형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조심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대조되는 인물이 곧이어 나옵니다. 한 가난한 과부입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이들이라고 질책하신 다음, 당신이 보신 가난한 한 과부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왜 지켜보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은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성전에 온 이들에 헌금함에 어떻게 돈을 넣는가 보고 계셨습니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선이 멈춘 곳은 그들이 아닌, 가난한 한 과부의 동전 두 렙돈입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화폐 단위로서 복음서에서는 미미함을 상징합니다. 그 돈은 성전중심체제의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어떤 권한이나 영향력 행사를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금액입니다. 예수님은 이 미미한 두 렙돈을 바친 과부야말로 누구보다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넉넉한 데서 얼마를 떼서 드리지 않고,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일부를 드리고도 전부를 드린 것처럼 자기를 포장하고 행동하는 이들이었다면, 이 가난한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일부에 불과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전부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큰 것처럼 여겨져도 전체 중에서는 일부에 불과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부와 일부를 가르는 것은, 양의 차이가 아닙니다. 양의 차이가 아니라, 전심을 다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전심을 다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심을 다해 쫓아야만 살 수 있는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팔아 그 보화를 얻습니다. 주님은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가 좋은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고 하셨습니다.(13:44-46) 또 있습니다. 주님은, 영생의 길을 찾아 당신을 찾아 온 부자 젊은이에게 그가 가진 전부를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19: 16-22). 이렇듯 하나님께 전부를 바친다는 것은,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전심을 다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4.

 

은총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인간의 길을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펴는 것이요,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손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은총으로 거듭난 삶, 회개한 삶입니다. 율법의 의를 쫓다 은총에 눈떠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도, 길을 잃은 자로 살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도, 또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눈뜬 루터도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인간이라는 죄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거듭나 복음의 빛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전부를 드린다는 것은 그분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헌신하면, 이만큼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의 전 존재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자가 구원에 이릅니다. 값없는 은혜는 값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분이 아닌 전체의 헌신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기의 전 존재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들이야말로 입술이 아닌 삶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앞서 읽은 시편은 이렇게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146:3-10)

 

5.

 

2018년 한 해의 신앙여정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는 전심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는지, 입술의 찬양에 머문 삶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는 저와 여러분의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이웃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펴고,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손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펼치는 우리의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한 주간도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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