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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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계신 곳

 

본문: 5:2-5; 1:46-55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2.23. 대림절 제4)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교회력은 이미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만, 2018년의 달력으로는 이제 한 주일이 남았습니다. 새롭지 않은 날이 있었는지, 혼돈스럽지 않은 날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올 한 해도 새로움과 혼란이 교차하는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1.

 

우리시대를 정의하는 여러 낱말 가운데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시대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란 책을 읽을 때처럼 첫 장부터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며 논리의 연계성을 만들어나가는 식의 독해가 아니라, 링크를 통해 특정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끊임없이 이동해 가면서 텍스트 전체를 오가는 방식의 독해를 일컫는 말입니다. 핸드폰으로 정치기사 읽다 연예기사 보고, 연예기사 보다 종교기사 읽고, 종교기사 읽다 쇼핑하는 식으로 서로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다방향으로, 그리고 비순차적 연계되는 방식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입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 시대는 서사(narrative), 곧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서사가 붕괴되다 보니 서사를 구성하는 맥락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보니 정말로 혼돈 그 자체가 됩니다. 경험을 이야기로 구성해 전달하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를 수많은 링크들이 대신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입니다. 우리시대가 성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성서가 이야기로 구성된 세계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정보라기보다는 의미맥락입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아종이 무엇인지, 아무르호랑이인지 시베리아호랑이인지, 그 호랑이는 왜 떡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호랑이가 어떻게 말을 하는지(!) 이런 질문들은 한 마디로 쓸 데 없는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의미이고, 그 의미가 전달되는 맥락입니다. 저는 어릴 적 겨울 밤 할머니의 이불 속에서 이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호랑이는 사라지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이야기의 힘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입니다.

 

2.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가 전달하는 의미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비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높다 여기는 이들을 낮추시고, 스스로를 쓸 데 없다 생각하며 낙심에 빠진 이들을 높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는 분이시지만, 비천한 사람은 높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부한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보다 자기의 부()를 의지하고 그것을 존재의 근간으로 삼는 이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게 하시는 분이지만, 주린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그분 앞에서는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수많은 장벽들이 사라지고, 나와 남 사이에 그어놓은 경계선들이 흐릿해집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들려주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렇게 말해 볼까요. 세상에는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가 있습니다. 억압이라고 하니 무언가 대단한 것 같고, 우리와 상관없는 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만, 나와 남이 있으면 그 안에서 힘의 불균형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흔히 남에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어제 뉴스에도 공항에서 신분증을 꺼내니 마니 하는 문제로 실랑이를 벌인 어느 국회의원 이야기가 나왔던데, 권력이란 이렇듯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강제할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런데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는, 이 권력이라는 것이, 남에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 권력자만 권력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힘이 바로 권력이라고 봅니다. 푸코 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은 이 권력의 자기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와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 우리는 크든 작든 이 비대칭적인 권력의 자기장 안에서 타인과 만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억압자가 되고, 또 어떤 관계에서는 억압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억압자 따로 억압받는 자 따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3.

 

복음은, 우리가 모두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 개신교신앙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받은 이로써 선을 행하고 의의 길에 서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이라고 해서 내일도 정의의 실행자일 수 없고, 지금 불의의 편에 선 사람이라고 해서 내일도 계속 불의한 상태로 남아있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내일은 내일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자리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공한 다음 변하는 이들이 있지만, 첫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조그만 자리에라도 앉으면 남들 조정하는 재미에 빠져 갑질하는 이들이 있지만, 권한을 위임받아 잠시 행할 뿐이라는 겸손한 청지기의 마음으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마음가짐의 차이, 곧 신앙인으로서 자기 존재의 자리를 잊지 않는 겸손함에 있다고 봅니다. 겸손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도서도 그런 태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존재의 자리를 낮은 곳에 두는 태도입니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럭저럭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입장과 처지가 다른 이들, 특별히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한 이들을 괄시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나는 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특권의식은 겸손과 아주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우리시대의 위험은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여기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 씨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우리는 위험의 외주화라는 슬픈 낱말을 언론을 통해 배웠습니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책에서, ‘부는 상층부에 축적되는 반면, 위험은 하층부에 축적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산개한 위험을 사회의 하층부에 집중시켜 관리하는 방식, 그러니까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들로 하여금 더 많은 위험을 감당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방식이 근대사회의 합리적작동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지적입니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무심하게 그런 말씀 많이 하셨죠. ‘공부 안 하면 저기 저 아저씨처럼 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이 더 이상 적합한 시대가 아닙니다. 공부 열심히 해도, 남들만큼 노력해도, 아니 어쩌면 노력만큼은 남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해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기 힘든 시대이고, 그 시대의 무게는 연약한 이들에게 가중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잘 살던 이들도 한두 번의 실수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아침 일찍 종로나 서울역에 나가면 노숙인들이 홀로 이른 아침을 맞습니다. 저분들이 처음부터 저러시지는 않았을 텐데, 언제 어떤 계기로 저렇게 거리에서 아침을 맞는 노숙인이 되었을까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서울만이 아닙니다. 일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태어나서 역 주변에 노숙인이 그렇게 많은 광경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샌프란시스코는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노숙인의 도시입니다. 미국의 동부 대도시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위험은 점점 하층부에 축적되고, 외주화 됩니다. 그래서 예전이었다면 웬만하게 살았을 이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가난하게나마 존엄을 유지하며 살았을 이들이 노숙인이 됩니다. 말자하면 위험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는 이들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는 특권의식을 지닌 이들도 그만큼 늘어나는 극단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마리아가 들려주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자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3.

 

마리아의 찬가에 앞서 읽은 미가서에서 예언자 미가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에서 작은 족속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메시아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닙니다. 권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제왕이 아닙니다. 그분은, 미가의 표현대로, “서서 그의 양떼를 먹이는 분입니다(5:4). 백성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적 군주가 아니라, 양떼들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산개한 위험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고 양떼를 먹이는 선한 목자, “서서 그의 양떼를 먹이시는 분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선하신 목자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시는 목자이시요(15:4), 심지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10:11)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 목자가 계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분, “서서 양떼를 먹이시는그분을 만나길 바란다면, 우리의 손과 발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수 나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마리아와 같은 겸손함으로 구원을 바라는 이들, 복음 안에서 새로운 삶이 열리기를 바라는 이들, 그래서 주님의 자비로 기쁨의 새날을 맞이하길 바라는 이들 가운데 전해진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제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우리는 성탄의 기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고,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하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서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쁨을 누리며 나누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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