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28 댓글 0

성령을 따라

 

본문: 이사야 43:1-7; 사도행전 8:14-25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13. 주현 후 제1)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내고서, 말하기를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 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시몬이 대답하였다. “여러분들이 말한 것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세례주일로 정해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만인 앞에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주현절을 보내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오늘을 세례주일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일 년에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 세례식을 행합니다. 세례주일을 맞아 성사에 대해 간략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저는 우리 개신교가 일곱 개의 성사 가운데 남겨 둔 두 개의 성사, 세례와 성찬을 소중하게 여기며,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성품(신품), 병자사가 가톨릭교회의 칠성사인데, 개신교는 세례와 성체성사(성찬)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의례에 대해서는 성사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목회활동에 포함시켜 수행하고 있습니다.

 

견진성사는 세례 받은 이가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 역할을 다할 것을 굳게 각오하는 의례입니다. 우리에게는 입교식인데, 성사로 행해지지 않다보니 신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교회의 일원이 되어 책무를 다한다는 것이 어떤 무게감을 지녀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숙고와 결단이 가톨릭 신자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견진, 곧 입교식을 통해 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여러 친목단체 가운데 하나에 몸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따라야 할 인생의 이정표를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역시 우리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공식 의례가 아니라, 목회상담과 병자심방, 목회기도 등의 목회활동에 녹아있습니다.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생사의 기로에 놓인 이들을 위로하며 새 희망을 불어넣는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며, 부름 받아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사제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기에, 실상 그것은 하나님과 고해하는 이 사이의 중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목자라 할지라도 신자가 고해자의 신상에 대한 질문을 사목자에게 한다든지, 혹은 사목자가 제삼자에게 고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직무를 위반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개인과 가정의 일을 공동체에 개방하여 함께 기도하며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만, 사사로운 관심이 도를 넘어 공동체 내 분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성품과 혼인은 일생에 한 번 뿐인 성사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품성사는 성직자의 안수식이고, 혼인성사는 신자의 결혼식입니다. 성직자는 혼인성사를 못하고, 신자는 성품성사를 못합니다. 그런데 개신교목사인 저는 결혼도 하고 안수도 받았습니다! 성직과 가장의 직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설마 부러우신가요? 둘 중 하나라도 잘 하면 좋겠습니다. 혼인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성사입니다. 배우자의 신앙생활을 돕고, 태어날 자녀를 신앙으로 인도하여 교회의 돌봄과 가르침 안에서 양육하겠다는 의지가 혼인성사에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인간적인 만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결실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선언하고 축복하는 교회의 인정과 지지가 여기에 담겨 있기도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혼인식을 경사(慶事)로는 여기지만, 성사(聖事)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가정이 출발하는 일이기에 성사라 할 만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500년의 시간은 이러한 의례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의례 중심의 신앙이 잃어버린 믿음의 본질을 추구해 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개신교는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의 전통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양성과 자유, 차이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개신교신앙의 장점들이 퇴색하여 한낱 시장의 논리가 되어버린 시대에, 세상 속에서 신실한 신자로 살아가기 위한 의례들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개신교인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세례와 성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목회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

 

세례는 정신의 계승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건 신앙공동체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의 표시입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고도 남녀가 부부로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은 각기 다른 길을 걸어 온 두 사람의 삶이 하나의 가정으로 새롭게 출발함을 공표하는 의례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자체가 남녀 간 사랑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받지 않고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식을 성스럽게 거행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교회의 의례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이 관계의 새로운 출발일 뿐 아직 완성이 아닌 것처럼, 세례예식 또한 거듭난 삶의 시작일 뿐 완성은 아직 아닙니다(홍정호, “뜻을 이루는 협력,” 신반포교회 주일설교, 2017.1.8.).

 

지난 성탄절에 우리는 두 명의 신자의 세례와 입교식을 행했습니다. 세례자들과 면담을 하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직 신실한 신자로 살 준비가 안 되었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세례를 받아도 되는 건가요? 목사님이 묻는 말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것은, 진실하지 않은 대답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입니다. 제가 드리는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세례는 인생에 이정표를 세우는 성사라는 대답입니다. 이정표를 세웠다고 해서 우리가 곧장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성숙한 신자의 삶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다만, 이제부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치판단의 기준, 복음에 근거한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의 다른 신자들 앞에서 공표하는 일이 세례의 의미임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사역을 완성하신 게 아니라, 출발하셨다는 사실, 곧 공생애의 길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삶의 완성은 십자가요, 부활이요, 영원한 삶의 영광이지, 세례식이 아니었습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의 파송을 받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전까지 여러분에게 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은,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로 지적합니다. 세례가 아니라, 성령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의 삶은, 감리교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말을 빌리자면, ‘명목상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의 삶입니다. 웨슬리의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세례 받고, 설교도 듣고, 교회 활동에도 참여하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웨슬리는 이런 이들을 올모스트 크리스천’,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언어와 행위에 익숙하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믿는 신자인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열심은 복음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고, 세속의 지혜나 자신의 경험을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반면 웨슬리는 구원받은 삶으로부터 성화(聖化)를 향해 나가가는 이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세례만 받은 신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이가 바로 올투게더 크리스천’,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회개란, 이렇듯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던 사람이 돌이켜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회개가 아니라 개종(改宗)입니다. 회개는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 세례를 받고 신자의 길에 들어선 이가 세례만 받은 교인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명목상 그리스도인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러 갔다는 사실,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다는 사실만 두고 보더라도 사마리아인들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고, 일체의 교류와 협력을 거부했던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이요, 유대사회는 이렇듯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이른바 타자화의 맥락 속에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 온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내심 불편하게 여겼습니다(4:27). 요한의 경우에는 베드로보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더 컸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로 태워버리실 것을 예수님에게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9:54).

 

이랬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로 먼저 다가가고, 부정하다고 여겨 온 그들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임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436, 1월의 결단찬송이기도 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의 가사를 기억하실 겁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감리교 목사인 이호운 목사님(李浩雲, 1911~1969)께서 작사하신 찬송시에 곡을 붙인 찬송가입니다.

 

4.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 ‘명목상 그리스도인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인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만 선택받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편협한 유대중심주의로부터, 인종적, 지리적, 그리고 이념적 경계를 펼쳐나가며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 손가락질 하던 죄인과 등을 돌렸던 원수마저 친구로 변하는 삶, 그것이 성령 받아, 성령과 동행하는 삶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성령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구하는 이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새해의 초입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올 한 해 신앙의 순례에 나서는 저와 여러분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한 주간도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