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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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본문: 에베소서 2:10; 전도서 3:12-14

설교: 이계준 목사 (2019.1.27.)

 

금년 새해 첫날 시인 김용택 씨가 일간지 칼럼에 매우 인상적인 자기 동네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시인은 태어난 동네에서 지금까지 사는데 40여 가구였던 것이 지금은 16가구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농부로써 오랫동안 좁은 지역에 같이 살다보니 이웃사촌이 되어 자기 일과 함께 남의 일도 돌보며 함께 먹고 마시다보니 함께 놀고 춤추는 살맛나는 공동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지금 세상이 광속처럼 변화무상하고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의 팽대로 인간이 버려지는 상황에서 시급한 과제는 4차 산업혁명에 앞서 인간혁명이라며 끝을 맺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연상하게 되었고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먹고 일하며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시골의 모델이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해서 좋을 것입니다.

 

20세기의 불란서 작가 싸르트르는 인생이이란 BD사이의 C. (Life is C between B and D.”)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B Birth 출생과 D Death 죽음 사이의 C Choice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세상에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옵션가운데 시골 사람들은 최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율법이나 명령에 맹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를 주셨다고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하다면 어떻게 하면 주어진 자유로 삶의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즐겁고 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올해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더욱 암울해질 확률이 높다니 자칫 비관주의나 개인주의가 판치기 쉬운데 어떻게 하면 참신한 자유가운데 즐겁고 신바람 나는 삶을 엮어 갈 수 있겠습니까?

 

허무주의 사상가로 알려진 전도서 기자는 기쁘게 살라.’(3:12a), ‘생을 즐기라.’는 이율배반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는 인생을 낙관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면서 즐거운 인생살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즐거운 인생이란 먹고 마시는 것’(2:24a)을 즐기는 것입니다. 날마다 때에 따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TV 프로에 등장하는 미식가들처럼 맛 좋은 음식만 골라 먹거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포식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미각적인 차원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건강과 기회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공급되기까지 수고한 이웃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에까지 이른다면 즐거움은 정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문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먹으면 맛 갈이 없어지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거나 허기질 때는 배가 고프고 살기 위해 먹기 때문에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29세에 유학가기 전까지는 음식이 맛있었다는 기억은 있으나 즐겼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일제 말엽과 북한 생활, 6.25 때 피난생활과 신학생 시절은 가난의 연속이었고 살기 위해 음식을 먹었습니다. 음식 자체도 부실했지만 정신적 여유가 없으므로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GDP 3만불 시대에 전통음식과 서양음식 그리고 휴전까지 풍족해진 우리 식탁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상적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한 끼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잔치가 벌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핵가족, 과외공부, 바쁜 직장생활 등 시간과 스트레스에 쫓기다보니 혼밥이나 배를 채우는 초라한 밥상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먹고 마시는 중대사를 즐기지 못한다면 우리 일상의 수고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잠언에는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17:1)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 위에 제아무리 산해진미가 쌓여도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지 못하면 모두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움을 회복할 길은 없겠습니까? 우리 내외는 각각 혹은 함께 사람들과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모임이나 동창회, 부부나 친교모임 등 매 주일 2-3회라면 은퇴자로써는 비교적 많은 편일 것입니다. 이런 만남과 나눔과 대화를 통해 웃고 즐기는 것은 혼밥이나 둘이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고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친구들과의 우정이 돈독해지고 그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더욱 깊어지므로 내 인생이 풍요해지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및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식탁에 앉으시기를 즐기셨습니다. 우리가 주일 마다 예배의 연속선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가운데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뜻 깊고 소중한 은총의 계기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대화와 관심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가지므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순수한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일상의 식탁을 만들어간다면 즐거운 인생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즐거운 인생은 자기 일에 만족하는 것입니다.’(2:24b) 우리 인간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수렵, 농업, 상업으로 발전하다가 산업사회를 거친 다음 오늘날 인공지능시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인류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K. 마르크스는 노동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과학의 발달로 인해 노동이 자연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변모하는 동시에 인간존재의 위기를 초래한 마당에 우리가 일에 만족한다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은 외견상 일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크게 나누면 자기가 원하는 직장과 직위에 있으면서 이에 상응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받는 사람들과 사회적 인정이나 물질적 보상은 별로지만 자기의 기술이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해서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일에 대한 만족 여부를 떠나서 일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오늘처럼 만족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대학 유발 하라리 교수의 저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 보면 인공지능은 2050년이 되면 예술에서 의료 부분까지 모든 직업을 새 것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문제는 새 직업들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므로 재교육 기간이 길고 초인적 능력이 필요하게 되어 결국 수많은 실직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청년 실직자의 누적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무직 사회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스라엘의 초정통파 남성들의 실상을 소개합니다. 이들의 약 50%가 직업은 없고 날마다 율법을 연구하고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데만 전념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인들의 노동과 정부 보조금으로 열약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일에 만족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무직 시대에 종교 활동이나 여타 정신노동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암시라고 하겠습니다.

 

무직시대를 위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장자의 유()의 철학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간은 일을 생계나 출세의 도구로 삼다가 일의 노예가 되고 동료 인간을 적대시하는 데까지 이른 멋없는 삶에서 장자의 유 곧 인생을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구글의 사옥명이 워크 스테이션이 아니라 플레이 스테이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은 일의 노예가 아니라 신바람 나는 놀이이고 바로 놀이에서 자기실현과 자기만족은 비롯된다는 상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에 유유자적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일이 욕망충족이나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상이란 화폭에 하느님 나라라는 유토피아를 그리는 예술행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군대나 무기도 없는 무기력한 예수가 막강한 로마제국에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모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고 외치면서 자기실현과 자기만족을 토로하셨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세속적 시각으로는 비록 초라하고 무의미해도 자신에게 보람찬 일이라면 거기에는 인생의 진실이 담겨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즐거운 인생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3:12:b) 좋은 일이란 주어진 일을 바르게 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써 이 기본 윤리를 지키려면 먼저 나 중심에서 너 중심과 우리 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기 일을 돌볼 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돌보는 것라고 하였고 예수께서는 더 나아가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의 좋은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생각할 때 아너소사이어티에 거액을 기부하는 것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에 띠는 일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우리의 일상 언행이 이웃에게 즐거움과 유익을 줄 수 있으면 족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씀으로 선행의 오버액선 overaction을 미연에 방지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먼저 인사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늙은이가 인사를 받으려면 먼저 인사해야 되겠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처음에는 잘 안되다가 계속하다보니 이제는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이웃끼리 소통하고 반기는 공동체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을 볼 때 흐뭇함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교회에는 초창기부터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선행에 대한 보상심리가 먼저 싹튼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축복받고 천당에 간다고 그런 믿음이 여전합니다. 잠언에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므로 넘치는 보상을 받는다.’(19:1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에 대한 배려가 주는 정신적 만족과 풍요한 삶이 이미 귀한 보상이 아니겠습니까?

 

에베소서는 보상에 앞서 인간이 본래 좋은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며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분의 작품으로 만드셨다.’(2:10)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즐겁고 신나게 살면 작품의 가치는 무한대로 증폭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을 위협하려는 모진 태풍의 닥쳐오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참신하고 신 바람나게 엮어갈 것입니까? 우리가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노는 즐거운 인생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와 삶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고 밥상공동체와 정신적 만족을 통한 자기실현과 존재에서 비롯되는 선행 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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