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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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의 길

 

본문: 시편 1:1-6; 누가복음 6:17-26

설교: 홍정호 목사 (2019.2.17. 주현 후 제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주일 아침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말씀은 시편 1편입니다.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복락을 누리는 삶인지 말합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삶,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삶,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삶입니다. 시인은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할 것이며,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정도(正道)를 걷는 이들이 누리에 될 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안에서 복락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시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삶이 복 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누가 악인인가? 악의 반대를 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선의 길에서 떠난 이들, 의의 길에서 벗어난 이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논의들이 펼쳐져 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정의합니다. 악이란, 본래 그러한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에서 선한 것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결핍상태에 있는 죄인들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통해 선을 덧입음으로써 선의 충족상태에 이르러 구원받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은총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은총론에 근거해서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선의 결핍 상태로부터 선의 충족으로, 죄인의 삶으로부터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체계를 발전시켜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악은 이러한 추상적 신학적 논의에 비해 구체적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악은 때로 선의 탈을 쓰고, 때로는 정의의 옷을 덧입고 우리 삶의 장소 곳곳에 숨어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선한 길을 따르는 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양심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양심에 따른 행동을 절대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선을 행하는 하나의 길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양심을 뜻하는 라틴어는 콘시엔시아입니다. 그런데, 콘시엔시아란 도덕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콘시엔시아의 의미는 자각에 따른 행동, 자기가 믿는 바에 따른 행동을 뜻합니다. 그래서 콘시엔시아에 따른 행동은 사회적으로 이미 형성된 문화적 체계인 도덕을 거스르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의 콘시엔시아에 따라 행동했을 때 그는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파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교회의 가르침보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보다 자기의 확신, 곧 자기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더 우선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콘시엔시아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러면 군대 다녀 온 나는 양심이 없는 것이냐?’ 하는 반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질문은 양심을 뜻하는 콘시엔시아를 도덕과 동의어로 생각한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어떤 이가 자기의 콘시엔시아’, 곧 자기가 믿고 확신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로 한 것처럼, 어떤 이는 그의 콘시엔시아에 따라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양심적 병역거부 담론에 담긴 철학적 함의입니다. 양심에 따른 행동은 개신교의 출발이기 때문에 사실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주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숙고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정치적 주제에 흡수되어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무튼, 선을 행하는 한 길은 자기의 양심, 콘시엔시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한 양심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점입니다. 교육을 통해, 그리고 실패를 반복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콘시엔시아는 선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 좋은 설교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콘시엔시아’, 곧 신앙양심의 성숙에 기여하여 바른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있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생각하는 바른 길이 꼭 옳은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에 어쩔 수 없기 갇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말에 갇히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의 역할은, 청중들로 하여금 바른 길이 어느 길인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설교를 통해 말씀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콘시엔시아가 복음적 삶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가 믿음의 자라는 길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삶, 그것은 신앙 안에서 올바른 양심을 갖도록, 그리고 그 길을 따르도록 끊임없이 정진함으로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둘째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삶입니다. 성서에서 오만한 자란, 대체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은 자리에 두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만이란, 단순히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고 뽐내는 태도에 있는 않습니다. 교만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행동한다할지라도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지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오만한 자는 행동하는 동기의 중심에 언제나 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형편을 헤아리거나, 다른 이와 더불어 사는 데 있어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대신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결국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해석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이런 삶은, 복 있는 삶과 멀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보지 않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는 먼 삶이 오만한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복 있는 사람의 길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라는 의미이겠습니다.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야 수평적 관계도 맺을 수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야,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때에도, 어디를 돌아봐도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느낄 때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 내린 삶은 흔들릴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런 이의 삶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일단 좋은 시냇가에 심기기만 하면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철따라 열매가 맺히는 나무와 같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포도 농사를 짓는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에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포도 농사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농사를 전혀 모르는 제가 대답했습니다. ‘햇빛이요? 물이요?’ ‘그것도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람입니다.’ ‘바람이요?’ ‘, 바람이 불어야 잎사귀 아래 있던 이산화탄소들이 날아가고 신선한 공기로 바뀌거든요. 포도농사에서는 그래서 바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람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잘 일구어 놓은 터전이 바람에 망가지거나 흔들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을 줄이고자 여러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농부의 말씀이 뜻 깊습니다. 우리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면, 바람을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람과 같은 인생의 외풍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 맺는 비결입니다.

 

반면에 악인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시냇가에 든든히 뿌리를 내린 나무와 달리, 뿌리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쭉정이는 바람에 흩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시인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자기 꾀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 오만한 이들, 그리고 율법에 뿌리내리지 않고 여기저기 표류하는 이들이 당장은 번창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의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꾀를 따르기보다는 올바른 신앙 안에서 길러진 양심을 따르는 길이요, 겸손히 자기를 낮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사람의 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근본으로 여겨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이의 길입니다. 시인의 말한 참된 행복의 길, 복 있는 사람의 길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복 있는 사람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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