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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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하시는 일

 

본문: 창세기 45:1-15; 누가복음 6:27-38

설교: 홍정호 목사 (2019.2.24. 주현 후 제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복음은, 기독교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원수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일부인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 반복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드시면서 너희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1.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하지 않고, 그에게 오히려 잘 해주는 것입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똑같이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똑같이 모욕하거나 몇 배로 돌려주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재해석입니다. 출애굽기 2123절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1:23-25)

 

구약의 율법 역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길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진 이들 편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갚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입은 손실의 대가로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약자의 입장에서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의 초점은, 강자들로 하여금 보복행동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약자의 보호받을 권리를 지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똑같이 갚아주라는 율법의 본뜻은, 잘못에 대한 부분만, 꼭 그만큼만 처벌을 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데 있겠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최후의 심판자다 되시는 분도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은, 구약의 윤리를 뛰어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똑같이 갚아주라는 율법도 약자 보호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똑같이 갚아주라는 말씀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잘 대해주고,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말씀은 더합니다.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29-30) 참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황금율(golden rule)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31)

 

대체로 잘못을 한 사람은 자신이 한 잘못을 압니다. 요새는 소시오패스니 사이코패스니 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관련된 범죄를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다 보니 나쁜 놈은 원래부터 나쁜 놈이고, 돌이킬 여지도 없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 이들은 전체에서 소수이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잘못을 자각한 이들은 대개 자기반성적 느낌을 갖게 되는데, 죄책감이나 수치심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대표적입니다. 현대심리학에서는 죄책감(guilt)과 수치심(shame)을 구분합니다. 죄책감은 자기가 한 잘못에 대한 부정적 느낌입니다.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기준이 자기의 양심이 되기 때문에, 자기 양심에 관대한 이들, 자기 합리화의 달인들은 죄책감을 덜 느낍니다. 그런데 수치심은 좀 다릅니다. 수치심은, 자기가 한 잘못에 대해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적 느낌입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은 자기의 양심이 아닌 타인의 시선입니다. ‘타인이 이런 일을 한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이 수치심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2.

 

저는, 오늘 원수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수치심에 관한 치유의 한 말씀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원수가 된 이들은 대체로 죄책감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자기 양심에 민감한 이들이었다면 나와 척을 질 이유가 별로 없을 겁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참고 참아도 똑같은 짓을 계속하니까 결국에는 원수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죄책감을 거의 못 느끼는 이도, 수치심은 느낍니다. 수치심을 느낀 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음지로 숨어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애적 행동에 도취되어 수치심을 우월감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와의 만남이 아닐까요? 받아들여짐의 체험, 어떤 이는 이 받아들여짐의 체험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앞서 읽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은 죄인이요, 요셉의 원수들입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자기연민에 빠져 억울한 감정에 머물러 있었다거나, 형들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면 어땠겠습니까? 형들을 만나기 전에 그가 먼저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우뚝 섰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45:7-9) 요셉은,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억울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돌리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당장에 죽여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원수들입니다, 형들은.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요셉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요, 요셉 개인과 그 가족의 일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믿음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도 요셉과 같은 믿음으로 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당장에 억울한 일이 있고, 불합리해 보이는 일이 있지만, 그 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질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물질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수 같은 이에게 물질도 주고, 마음도 쏟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려주시되 넘치도록 후하게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유념해야 할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받은 이를 통해 나에게 돌려주지 않으시고, 다른 이를 통해, 다른 계기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되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원수는, 내가 물질을 주고, 인정해 주고, 사랑을 준다고 해도 계속 원수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원수가 하루아침에 변해서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런 극적인(dramatic) 변화는 아예 일어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배나무에서는 배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리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배나무에 아무리 정성을 쏟고 사랑을 준다 해도 배나무에 사과가 열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신 사람은, 우리의 노력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제 모양대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원수는 내 바람대로 바뀔 리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이를 통해 채워주십니다. 내가 변화를 기대한 그 사람, 내가 변화를 기대했던 그 장소가 아니라, 뜻하지 않았던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또 계획하지 않았던 장소로부터 주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원수를 사랑하는 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도구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힌바 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며 잘 따르는 것입니다. 원수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해야 할 윤리가 아니라, 내가 따라야 할 삶의 이정표입니다. 이런 신앙 격언이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그것은 희생이지만, 다른 이보고 십자가에 오르라고 하면 그것은 살인이다.” 목사니까, 장로니까, 신자니까 당신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한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이 나의 몫이 되기를 바란다면, 원수 사랑도 나의 몫으로 여겨야 합니다.

지난 한 주 저를 위로한 시편의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84:5)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사랑할 힘을 얻는 자, 주님께 위로를 받는 자, 그래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비와 사랑을 나누십시오. 사랑하되 그가 변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이를 통해, 다른 계기들을 통해 은혜를 넘치도록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의 신비를 안고, 주님 뜻 따라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나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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