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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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라

 

본문: 창세기 15:1-12; 누가복음 13:3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19.3.17. 사순절 제2)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 가지고 오너라.”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51절에서 12절의 말씀입니다.

 

1.

 

아브람은 그의 나이 일흔다섯에 새로운 인생의 길을 떠났습니다(12:4).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12:1-3)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제 노년에 접어든 아브람을 흔들었습니다. 일흔다섯 해의 생을 살아오면서 아브람은 지역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성을 쌓았고, 이로써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에게 찾아온 계시(啓示)의 순간을 무심히 넘겨버리지 않았고, 감춰진 것이 드러난 계시의 체험과 더불어 인생의 새로운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고향 우르를 떠났으며, 그렇게 일흔다섯이 되어 하란을 떠났습니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그리고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그의 종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뿌리째 옮기는 큰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2.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고향을 떠나 언약의 땅으로 떠나는 아브라함의 여정을 고향 아타카로 돌아온 오딧세우스의 모험 이야기와 대비시킵니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의 주인공 오딧세우스는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다시 고향 이타카로 돌아옵니다. 초라한 걸인의 행색이었지만, 숱한 고난을 겪은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단단해졌고, 마침내 오딧세우스는 아내와 아들을 해하려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불굴의 영웅으로 재등장합니다. 오딧세우스 이야기가 서양의 고전인 까닭은, 비극적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강인한 존재의 모습이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오딧세우스가 이타카를 떠나 경험한 고난들은 결국 그를 더욱 더 강한 존재로, 이전보다 더 크고 단단해진 자아로 회귀하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결국 오딧세우스의 경험은 자기를 키운 여행이었던 셈입니다.

 

반면, 레비나스에 따르면, 아브람의 여행은 자기의 크기가 아닌 타자의 크기가 더 커지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는 이타카로 돌아온 오딧세우스와 달리 자신이 떠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여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는 잠시 떠났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주 떠났습니다. 여행자가 아닌 이민자의 삶이었던 셈입니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자기에게 익숙했던 생각, 관습, 문화의 옷을 벗고, 타자적 시선으로 자기를 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브람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 레비나스의 말로 하자면, 타자의 이끌림에 자기를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타카로 돌아온 오딧세우스의 여행은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주체로의 여행이었던 반면, 아브라함의 여행은 주체로의 여행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덜어내고 자기를 우연과 사건에 더 많이 개방하는 타자로의 여행이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비춰보자면 신앙생활은 결국 자기를 덜어내는 과정입니다. 자기의 주체성을 강화해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일의 크기를 늘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서 되는일상의 체험이 더 많아지고, 되는경험의 크기가 더 커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수동적인 것보다 더 수동적이 되는 길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사실 잘 들리는 말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말일뿐더러 일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불편하고 싫을 때가 있습니다. 다 주체가 되겠다고, 다 주인으로, ‘으로 살아보겠다고 너나없이 나서는 마당에 의식적으로나마 의 삶을 자처한다는 것이, 무언가 위선적인 것 같고, 때로는 자기 분열적인 것 같고, 그래서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얘기를 좀 더 해 볼까 합니다.

 

3.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만 해도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확신의 크기가 의심보다 컸기에 일흔다섯의 나이에, 가족과 가산을 모두 가지고 큰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하란을 떠난 이후의 여정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거기에서 베델의 동쪽 산간지방으로, 거기에서 또 남쪽 네겝으로, 거기에서 또 이집트로, 거기에서 또 헤브론으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 다녔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란에 있는 동안 그는 자기 이름에 자부심이 있었을 겁니다. 남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리에 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는 곳마다 적들과 싸워야 했고, 기근과 씨름해야 했고, 그것보다 더 큰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워야 했습니다. ‘존귀한 아버지아브람으로서 지역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셈이 된 것입니다.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인생에서 감춰진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낯선 땅에서 매일 밤 후회하며 잠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15: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칼이다하지 않으시고 나는 너의 방패다하셨습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방패입니다. 낯선 땅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이 위협당하고, 그가 일궈 온 재산을 빼앗기는 위협이 지속되는 가운데 아브람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이제라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까 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이 나이에 여기 와서,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내가 미쳤지!’ 여러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에게 묻고 계시는 겁니다. ‘누가 너의 방패냐? 가족이냐? 재물이냐? 명성이냐? 아니면 세상의 권세자들이냐? 아니다, 내가 너의 방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아브람에게는 별처럼 많은 자식은커녕 한 명의 자식도 없습니다. 나이도 많아 더는 자식을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하셨습니다.

 

4.

 

아브람은 매일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이 눈을 들어 바라본 별은 처음 본 별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보이는 것이 밤하늘에 별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그가 매일 바라보던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보던 별이었으나 자기의 안목에 갇혀 보지 못했던 별을, 주님은 바깥으로 불러내셔서 지금 다시금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체험, 자기 경험의 외부에서 자기를 타자로 대면하는 체험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 순간 아브람의 눈이 열렸습니다. 매일 보던 밤하늘이고 별이었지만, 이제는 그 별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깥의 체험, 계시의 체험입니다. 계시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일들을 낯설게, 그러나 의미로 충만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우리 인생의 전환이 일어날 때, 그때가 바로 계시의 순간인 것입니다.

 

매일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린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믿게 되었다, 혹은 믿어졌다는 수동형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매일 바라보던 밤하늘을 보며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떠올랐고, 그 언약의 하나님이 믿어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15;6) 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이나, 그분의 어떤 말씀의 일부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주님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향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다시금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기의 길을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같이 봉독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13:33) 하셨습니다. 여우 헤롯이 그분을 위협해도, 거짓 예언자들과 세상의 권세자들이 주님의 길을 가로막아도, 그분은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하나님의 의지하여, 그분이 가셔야 할 복음의 길을 굳세게 가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것이 의 길이요, 나와 이웃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인간적인 책입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은 아브람이었으나, 창세기는 곧이어 이렇게 기록합니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15:12) 말하자면, 은혜받고 새사람이 되어도 인생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때때로 그를 깊은 어둠과 공포 가운데로 몰아넣기도 하고, 그를 짓누르기도 했다,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내신 아브람이었고, 환상 가운데 용기를 주신 아브람이었으나, 그런 그도 해가 질 무렵 자신을 짓누르는 어둠과 공포, 그리고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긴 여정 속에서 둘러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인간적인 흠결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사심 없고, 용기 있고,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그런 철인 통치자의 면모는 사실 아브람에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때로 목숨을 구걸했고, 왕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함을 보였으며, 욕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들어 열방의 아버지모든 민족의 아버지아브라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는 이 모든 인간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굳센 믿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흔들렸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깊은 어둠과 공포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방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인생의 길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근심에 쌓이고, 때로는 공포에 짓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믿음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오늘 그의 가야 할 길을 믿음 가운데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위대함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여러분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 인생의 짐은 무엇입니까? 때로 그 짐에 짓눌려 깊은 어둠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신세를 한탄하고, 남 탓이나 하면서 귀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바깥으로 나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하늘의 별들 속에서 방패이신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방패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이길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도 염려했고, 예수님도 흔들리셨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더라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 굳건히 서시기 바랍니다. 비록 광야에 선 오늘이라 할지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뜻 이루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딘 이를 결코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한 주간도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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