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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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뜰에서 행하신 일

 

본문: 신명기 14:22-29, 마태 21:12-13

설교: 이계준 목사 (2019.3.24.)

 

1.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처음 행하신 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뜻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의 본문 마가복음은 전하기를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 들어가셔서 비둘기 같은 제물을 팔고 사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을 쫓아내시고 의자를 둘러엎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약 이사야 56:7의 말씀으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은퇴한 신학자 하비 콕스는 그의 저서 <신이 된 시장>Market as God에서 성전 뜰에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께서 성전 뜰의 장사치들과 환전상을 쫓아낸 사건을 마치 신성한 장소의 담장 안에서 세속적인 상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잘 못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에도 바깥마당 안에 제물로 사용할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들의 공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 등 멀리에서 온 사람들이 제물을 사기 위해 자기들의 화폐를 예루살렘 화폐로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장사치와 환전상들을 뜰에서 내쫓은 것입니까?

 

콕스 교수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행동은 거룩한 성전 뜰에서 환전이나 제물 사고파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이 제물 값과 환전 수수료를 너무 비싸게 매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속이고 착취할 뿐만 아니라 성전의 사제들에게 상납하고 그 비리가 로마의 권력자들에게까지 연유된 구조 악에 대해 감지하시고 강동의 소굴이라고 하신지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약자들의 유익을 위해 상인들의 기만과 착취에 반대하고 구조 악에 항거하신 행동은 지배계층에 대한 도전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를 해치려는 권력자들에게 또 하나의 빌미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행하신 일 곧 가난한 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사상은 개인의 철학적 발로가 아니라 유대교 율법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인 신명기의 십일조 규정에는 이례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14:29)

 

이러한 박애정신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이 7일마다 오는 안식일과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고 그 절정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를 희년 곧 Jubilee로 선포된 것입니다. 희년의 특징은 세 가지인데 모든 노예는 누구의 소유든지 자유를 얻고 가난한 사람은 팔았던 조상의 소유를 돌려받으며 땅은 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특히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설교하실 때 그 주제가 희년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셔서 내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공생애 처음으로 설교하신 말씀과 공생애 마지막에 성전 뜰에서 행하신 일 사이의 일관성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자유와 재물의 분배 및 자연의 보존을 통해 희년 곧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희년이 예수 시대에는 로마의 가혹한 과세정책과 억압적인 토지규제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했지만 사람들은 희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박애적인 희년은 중세기 가톨릭교회에서 재현되면서 본래정신이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 보나파시오 8세는 1300년을 소위 성년(聖年)이라고 선포한 다음 로마의 모든 역사적인 교회를 개방하고 교황이 유럽 각지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사해주는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관은 범죄자에게 옥고 대신에 순례를 선고하였고 교황이 무조건 용서해 준다는 약속 때문에 온 갓 범법자들의 무리가 1299년 성탄절을 앞두고 로마에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때 여관과 식당 주인들은 파스타와 적포도주를 유감없이 팔아 떼돈을 벌었고 성직자들은 면죄부를 팔아 금고를 채웠다고 합니다. 돈 맛을 본 사업가와 성직자들은 희년을 자주 치르자고 압력을 가한 끝에 교황 우르바노 6세는 희년 주기를 예수님의 생애인 33년으로 단축하였습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다시 33년 주기를 무시하고 희년을 선포하자 수 만 명이 로마에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마침 흑사병이 천막촌을 휩쓸었고 한 다리에 군중이 몰리면서 수백 명이 깔려 죽거나 강에 떨어져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중세교회는 예수께서 행하신 본래 희년정신에서 탈선하면서 부의와 부패의 길로 치달았고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초래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3.

 

우리는 2000년 전 예수께서 깨끗케 하신 예루살렘 성전 뜰이 중세기 가톨릭교회로 인해 쓰레기 처리장처럼 되었고 그 여파가 물질문명에 의해 우리 현대인의 일상적인 성전 뜰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성전 뜰 안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장 곧 국가 간이나 기업체 간에, 은행이나 증권회사 간의 상행위가 기만과 착취, 갑질과 약탈의 형태로 공공연하게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랍고 참담한 것은 성전 안인 로마 가톨릭 교황청 은행을 비롯해서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비자금과 회령을 비롯해서 온 갓 비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최대기업은 곧 정치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촌 모든 나라의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유착되어 온 갓 불의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강대국들이 자원 착취와 상품 소비를 위하여 약소국들을 식민지화하려고 제1,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21세기에는 미국의 멕시코 국경지역에 방벽 설치, 영국의 Braxit, 중국의 대외정책, 남미와 중동의 독재정권, 민족 및 종교 분쟁과 테러는 물론 북한의 핵개발, 우리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 등은 모두 경제문제와 직결된 것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계층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악행의 주범이라고 말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이런 불미스런 일들이 벌어지는 지구촌 성전 뜰에 오셔서 거기서 서성대는 우리를 보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규정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제물을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장사치나 환전상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기만과 착취의 희생양인 동시에 오늘의 거대한 세계적 경제 망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이득을 위하면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지키는 우리 크리스천은 먼저 희년의 정신 곧 인간의 자유와 경재의 재분배와 자연의 보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각으로 재무장해야 하겠습니다. 근자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은 희년의 정신을 대변하던 NGO들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인권 말살과 경제적 불의와 환경파괴가 백주에 난무하는데도 오늘의 예언자로 자처하던 NGO들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정치권력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은 하늘나라의 시민 곧 우리 크리스천이 자각하고 희년의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도외시하거나 무관심한 죄를 깨닫고 삶의 현장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길을 찾는 일은 결코 손쉬운 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생을 두고 날마다 점진적으로 또한 급진적으로 해야 할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형, 무형의 피해를 자초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년의 정신을 삶의 모토로 삼고 그것을 가사와 직업, 사회활동과 교회생활을 통해 실현하려고 심혈을 기우리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마땅히 따라야 할 위대한 사명인 동시에 영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예단할 수 없는 것은 지난 2000년 동안 성전 뜰은 정화되지 않았고 오늘의 용어로 말하자면 적폐로 얼룩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의 희년 정신이 20세기 M. 간디의 비폭력정신에 반영되어 인도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흉탄에 쓸어 진 M. L. 킹에 의해 흑인행방의 기치가 높이 들림으로써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주변 모든 나라들이 이민자나 난민들을 배척하는데 자기 정치적 입지가 약화됨에도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관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동독 목사의 딸로써 과거 공산치하에의 고초와 예수의 희년정신 위에 굳게 섰기에 가능하고 이로 인해 전 세계 지성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희년정신은 우리 선조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희생된 3.1운동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우리 민족정신의 중추역할을 했다고 말해 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예수의 희년정신이 실패하거나 무용지물이 아니라 만고의 진리로서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지금도 쉼 없이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가 지금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책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 호모 사피엔스라는 우리 인간이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지혁명을 일으켰는데 이것 없이는 기독교나 불란서혁명의 발생이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지구촌이란 성전 뜰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와 죄악의 현실을 직시하고 예수님의 희년정신을 따라 결단하고 헌신하는 정신혁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정신혁명의 불씨가 타오른다면 우리의 존재의미와 크리스천 정체성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새 세계가 우리 앞에 전개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절에 주님과 함께 고난의 순례에 동참하시는 여러분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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