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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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31.

신반포교회

잔치가 열렸는데

 

본문: 누가 7:36-50

설교: 김고광 목사 (수표교교회 원로목사, 2019.3.31.사순절 제4)

 

1) 교회력으로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순절/Lent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절기에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이 잔치를 한번쯤은 떠 올립니다.

 

하여튼 차이는 나지만 4 복음서에 이 잔치이야기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이 잔치는 교회에서 소문난 잔치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이야기가 나오는 마태 26:6-13/ 마가 14:3-9/ 누가 7:36-50과 오늘 성서일과인 요한 12:1-8과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2) 그 차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 우선 이 잔치가 열린 시기가 다릅니다.

요한을 위시한 마태, 마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쯤에 열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 잔치가 십자가 사건일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열렸습니다.

 

) 이 잔치가 열린 장소도 다릅니다.

요한에는 거기서라는 말로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 동네에서 이 잔치가 열렸다고 합니다. 마태와 마가에는 베다니에 사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누가에는 구체적인 지역 없이 바리새파에 속한 어떤 사람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 다음으로는 이 초대한 사람도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에는 나사로가 사는 집으로 보아서 이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라고 보는 주석가도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나병환자인 시몬이 초대했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름 없이 바리새파에 속한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다.

 

) 향유를 부은 여인의 신상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자리 잡아 있고 마르다는 역시 일을 거들고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누가에는 그 동네에서 나쁘게 소문난 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그냥 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고 누가에서 질이 나쁜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라고 하는 바람에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다고 정설처럼 되었고 우리 찬송가 211장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 이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누가 7:47을 놓고 천주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현격한 교리적인 차이와 간격이 있습니다.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천주교회에서는 사랑이 용서에 앞선다고 하고 개신교회는 용서가 사랑에 앞선다. 라고 합니다.

(김근수. 가난한 예수. 154-155 참조).

용서가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또는 용서와 사랑은 항상 함께 가는데 우리는 여기서 요한 110을 따라 사랑,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앞선다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한 시비가 일자 예수님의 결론이 또한 다릅니다.

 

마태는 여인의 이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온 세상에서도 기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가난한 사람은 늘 함께 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내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에는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시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요한은 마가와 같은 내용입니다.

 

3) 이렇게 각기 다른 4복음서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보는 주석가들은 이 향유를 부은 일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던 2가지 잔치가 따로 따로 있었다고도 합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이야기를 그의 교회 교의학, II/2권의 은혜의 선택/예정론을 다루는 가운데 선택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의 전형으로 가룟 유다를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교회 교의학 II/2. 496 이하).

 

너무 신학적인으로 나간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바르트는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주님 예수를 돈으로 팔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데 대해서 인간에 대한 깊은 배신을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요 그 중에서도 회계를 담당하도록 신임을 받았던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단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다는 이 일은 먼 옛날의 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고 물신(物神)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또 그렇게 하고 있는 우리와 교회지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오늘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4) 여기서 우리는 조용히 마음의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펴 봅니다. 그리고 이 잔치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가 되어봅니다.

 

) 중요한 장면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잔치자리에서 나는 어느 자리에 서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으로 그려보기 바랍니다.

 

) 다음으로 우리는 오늘 이 장면을 교회, 그것도 천국잔치라는 말을 많이 쓰는 한국교회의 잔치자리들을 상상해 봅니다.

 

사순절이 되면 교회마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말씀, 향유옥합을 깨뜨린 이 말씀을 가지고 하는 설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잔치자리는 어떤가 하는 질문과 나는 거기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우선 이 잔치자리를 교회공동체로 비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교회의 그 어떤 잔치자리도 주님을 모신 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른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보시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하는 찬송가의 뜻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5) 그렇다고 하면 우리 교회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듭니다.

그것도 주님과 더불어 하기보다는 우리끼리 말입니다.

 

) 지금 우리 한국사회는 여러 면에서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드리다가 문득 깨고 나니 이게 아닌데 하는 혼란에 쌓여 있지 않나 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적으로든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노래하면서 너무 일찍 잔치를 열고 우리끼리 축배를 마셨습니다. 그것도 많이 그랬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사회경제는 위기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 한국교회도 기적적인 성장과 함께 너무 일찍 추락의 위기를 겪는다고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만의 잔치를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생각 없이 열었습니다.

 

) 주님을 모신 이 잔치자리에서조차도 주인과 주인공 사이에, 초대 받은 자와 초대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그 식사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인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기는 갔지만 거기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신다는 그 자리에서조차도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음 편히 그 식사자리를 마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자리는 그렇다 쳐도 교회공동체, 그것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예배공동체 자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모신 자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6) 이 잔치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지도 문제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잔치의 주인은 초대한 사람이 됩니다.

 

) 그러나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내가 우리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잔치를 열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계신데 내가 초대했으니 내가 주인이라고 하면서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자리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을 모신 자리라면 그 자리에 누가 모여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연히 주님을 주인으로 주인공으로 모셔야 합니다.

 

)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잔치자리, 천국잔치에서, 예배공동체에서 누가 주인이 되고 또 누가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교회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우리 마음이 찜찜하고 찔리는 것이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라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주님이 주인공이신 이 잔치자리에 나는 어떤 자리에 앉아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오늘 우리의 초점입니다.

 

7)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한국교회에, 그리고 우리교회로 말입니다.

나는 이 잔치자리에서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가?

나는 이 잔치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거기 연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 잔치자리에서 주인이나 주인공의 노릇을 합니까?

나는 이 잔치자리에 초대받은 손님노릇을 합니까?

나는 이 잔치자리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바리새파 사람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초대받지 못한 여인이 하는 일이 어떤 이유에서 못마땅해서 야단을 치는 사람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 잔치자리에서 시중을 들면서 허드레 일을 하고 있는 하인의 자리에서 하인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초대받지 못한 여인의 자리에서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있습니까?

나는 이러지도 않고 제삼자의 위치에서 눈치만 보고 방관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잔치자리에서 나는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8) 본문에 나오는 잔치자리를 마련한 사람이나 거기 함께한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로 치면 기성교인들, 그 중에서도 교회의 임원들, 힘 있는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초대받지 못했거나 초대는 받았지만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교인들, 특히 새로 나온 교인들일 것입니다.

 

) 이런 잔치자리에서 주인과 함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나는 주인공이신 예수님과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때는 몰라도 일이 생기면 달라집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자들은 소위 말해서 힘이 쌘 사람들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힘을 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도 그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들의 권위에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합니다.

 

) 거기 비해서 초대받지 못한 이 여인은 처음 나온 교인들이거나 교회 안에서 큰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의 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잔치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인이라고 해서 그랬는지 또 나쁜 소문이 난 죄인이라 그랬는지 또 그래도 얼굴은 오다가다 아는 사람이라 그랬는지 또 자기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에 그저 그런 사람이라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자기 일을 시작하자 사정이 확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지금까지 해 온 일과는 다른 일을 시작했을 때 주목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이 이런 큰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일을 할 때 주목을 받습니다. 자기들은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지금까지 자기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시작할 때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9) 그때부터 이 여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교인들이 처음 왔을 때 크게 주목하거나 기대하거나 환영하지 않았는데 일을 시작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 먼저 이 여인의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여인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에 비해서 남자는 죄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남자의 이런 죄는 누구도 꺼내지 않는데 여자의 죄만 들추는 것이 정당할까요? 만약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람이 남자였더라도 이렇게 죄인이라고 신상 털기를 했을까요? 그리고는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낭비라고 합니다.

 

) 그리고는 더 좋은 이유를 붙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큰돈을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써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이유는 그럴듯합니다.

가룟 유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곳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유다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 이 여인은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하던 일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그런 시선과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만 울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 시작합니다. 겸손과 희생, 믿음과 사랑으로 확신에 가득 찬 행동이었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복음의 사역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힘입니다.

 

10) 오늘 교회에서 이런 잔치나 예배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회자입니다. 주님을 모신 잔치자리에서 목사의 자리는 어디며 목사는 무슨 일을 할까요?

 

) 목사는 그 자리의 주인도 더구나 주인공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사/성직자는 이런 잔치자리에서 제삼자나 방관자도 아닙니다.

목사는 주인이 아니라 어떻게 주인공을 더욱 잘 보이게 하고 또 자신은 결코 주인공의 자리에는 앉지 않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이와는 다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라고 하면 무리한 말일까요?

 

)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알고 바로 잡으려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눈총을 받거나 비난이나 외면을 당합니다.

 

) 이런 잔치자리에서 목사/성직자라는 사람은 교회 주인이나 주인공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그 잔치에서 주인공과 초대받은 사람들을 세우고 섬기는 하인 같은 사람입니다.

 

) 그렇다고 목사/성직자가 이 자리에서 감독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 또 성직자/목사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순종과 희생을 강조하는 설교자가 되거나 또는 설교자로서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성직자/목사는 이 잔치자리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자리에는 왔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나아가 오히려 질책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섬기고 예수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11) 한국교회에는 잔치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풍성했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도 많았고 돈도 많았습니다. 너도나도 큰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잔치자리에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였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이 달라집니다.

 

물론 말은 예수님이 주인이요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내걸린 현수막들은 무슨, 무슨 축하예배였지 예수님이 이 잔치자리의 주인공이라고는 드러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 지금 교회에서 예수님은 존재감이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으로 예수님은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게 보이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인 시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손님을 초대하면 가장 평범하게 맞이하는 발을 씻는 물도 없었습니다. 맨발에 양말도 없이 딸랑 샌들만 신고 다니는 사회에서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발을 씻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없었던 그 잔치자리에 주인공이 무슨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누가 7:40-46에서는 예수님이 초대 받은 주인공이지만 그렇게 주인공다운 대접은 받지 못하신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마치 오늘 교회에 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대접을 받고 계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취급하는지 그 적나나한 모습이 드러나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런 교회의 잔치자리에서조차도 주님의 자리보다는 사람들의 자리가 더욱 돋보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힘 있는 분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잔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돌이켜보면 저도 목회할 때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었고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주검을 준비하는 자리도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한국교회가 썰렁해지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고백합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12) 보다 못한 예수님, 듣다 못한 예수님, 주인공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조차 하지 못했던 예수님이 앞으로 나섭니다.

 

) 다른 복음서에는 이 여인의 일은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여인이 한 일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질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확신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하늘의 평안이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죄인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 주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인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그 자체가 제일이지 다른 것은 둘째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사랑과 용서, 구원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더 이상의 분쟁과 싸움도 미움도 없습니다.

 

) 예수님은 이런 일을 위하여 자기 발을 이러한 인간에게 내어 주시고 주님은 이런 일을 위하여 자기 몸과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걱정하는 교회/성직자/교인들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화되고,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13) 다시금 우리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이 잔치자리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교회공동체에서 내가 선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의 목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인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걱정입니다. 잔치자리는 열었는데 오는 사람 대신에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들이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가까이 서 주고 함께 들어주는 주님을 대신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못 만나지는 않았을까요?

 

올해 사순절에는 우리교회에서는 주님이 진정한 주인이 되시고 주인공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해서 모두가 섬김의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아름다운 잔치가 열리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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