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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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 예수님

 

본문: 시편 118:19-29; 누가복음 19:28-40

설교: 홍정호 목사 (2019.4.14. 사순절 제6, 종려주일/고난주일)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 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겠습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를 기념하여 이날을 종려주일로 칭해 왔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나무가 종려나무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감리교의 모교회인 성공회 예배에 몇 개월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종려주일에 전 교인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배당 주변을 돌던 장면입니다. 말로만 듣던 종려나무 가지를 그때 처음으로 손에 쥐고 교회 주변을 돌아보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종려나무 가지는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서 말려두었다가 태워서 이듬 해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재의 수요일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종려나무 가지가 재가 되어, 죄를 회개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 마지막 일주일의 시작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일주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고난주간으로 선포하고,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며 거룩한 생활을 위해 힘써 왔습니다. 올해 고난주간에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성찰하고, 믿음의 바른 길 가도록 힘쓰는 한 주로 보내려고 합니다.

 

2.

 

오늘 본문의 시인은,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고 노래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응답을 구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구원을 간구해야 하는 상황은, 인간적으로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118편 앞선 절에 나온 내용들로 추측컨대 시인은 적대자들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망하는 것을 내가 볼 것이다.”(118:7) 그는, 얄밉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처럼 제삼자적 입장에서 시인의 고백을 들으면, 그의 말이 순전히 자기의 입장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또 얼마간은 강박적인 고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 고백이, 지금 절박한 고통에 직면해 있는 이의 탄식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적대자들의 모함으로 인해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 별다른 방법도 없는 약자의 탄원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 사람의 고백은 절박한 구원의 요청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이런 고백을 하는 이의 자리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에게는 지금 의지할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높은 사람은커녕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왕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 그는 그 사회에서 설 자리를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한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은, 이제 그가 그 사회의 공공의 적이 되어 아무도 그를 돕지 않을뿐더러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조차 왕에 대한 반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입니다.

 

3.

 

아감벤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일컬어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 아무 때나 죽일 수 있지만, 신성한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존재, 그래서 한 사회로부터 낙인과 배제를 동시에 당하는 존재가 바로 호모 사케르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러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가 잡힌다면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말할 것이고, 그가 죽는다면 사람들은 잘 죽었다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중략)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여라.”(5:45b-46) 누가복음은, “너희도 완전하여라하는 구절을,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하는 말씀으로 풀었습니다. ‘호모 사케르가 된 이, 당장에 죽음을 당하더라도 사람들이 잘 죽었다’, ‘정의가 실현되었다말할 처지에 있는 이라 할지라도, “너희는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이렇듯 분명하다 해도 현실의 벽은 높습니다. 일평생 예수를 믿어도, 자기의 편견 하나 넘어서지 못하는 어둠이 그림자처럼 드리운 존재가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 사는 세상에서 부정적 낙인이 찍힌 자가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이런 높은 편견의 벽 앞에서 억울한 처지에 놓인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의지할 높은 사람은커녕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시편에 나온 자기중심적인 구절들은 이런 절박한 사람의 자리로부터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밝은 이성을 가지고서는 이 편파적 신앙고백에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전에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 선배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목사이지만, 대학에 몸담고 있다 보니 목회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교수로서의 삶에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그럭저럭 지내왔는데, 뜻하지 않게 복잡한 학내 정치에 얽혀 억울한 일을 당하다 보니 새벽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침마다 읽는 시편의 말씀이 그렇게 와 닿을 수 없더라, 일평생 시편을 읽고, 설교도 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는데, 요즘은 매일 아침 시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있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내몰린 이들,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의 기도가 편파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겁니다. 우리가 시인의 처지가 된다면, 이런 기도는 편협함이 아니라 간절함과 절박함의 표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는 신앙고백에 이르기까지, 그가 인생사에서 겪었을,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경험했을 풍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을 바라는 이의 간절함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 이로서는 이해할 수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것이겠습니다만, 비슷한 입장에 처해 본 적 있는 이라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님만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비록 내몰린 처지에 있고,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이 아무도 없으나, 시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새 힘을 얻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118:22-23)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118:24) 기뻐할 처지에 있지 않은 이의 기쁨의 고백, 그것은 외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기쁨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쁨의 고백입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때 내버린 돌취급을 받지 않는 삶이 있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내버린 돌이 새로 지어질 집의 머릿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손에 붙들린 이의 삶입니다.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낮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은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매일을 이 날은 주님께서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백하면서, 오늘의 은총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 존귀한 자라 칭송받던 이들의 내버린 돌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님을 당신께서 주인이 되시는 새로운 세상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른 많은 이들은,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만, 주님은 그들 안에 있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끌어내시어 당신의 일을 위하여, 복음의 귀한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반석이시고,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거듭난 인생의 반석, 머릿돌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믿음으로 변화되는 삶을 향하여, 날마다 새로운 삶의 기쁨으로 충만한 존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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