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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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을 위한 복음

 

본문: 시편 23:1-6; 사도행전 11:1-18

설교: 홍정호 목사 (2019.5.12. 어버이주일)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하고 그를 나무랐다.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황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하늘에서 드리워져 내려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 모든 것은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때에 사람들 셋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내게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이 내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우리는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천사를 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습니다. 곧 천사가 그의 집에 와서 서더니, 그에게 말하기를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너라.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다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하고 말하였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이고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은 우리 삶의 뿌리이신 부모님의 은혜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과 희생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돌봄과 희생 속에서 저물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잘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와 돌봄이 필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생명이 잘 저물어 가기 위해서도 이러한 관심과 배려와 돌봄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덕분에 사는 존재입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매 순간은 나를 위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누군가의 덕분에 지속되고 또 결실을 맺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의 오늘을 위해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은 분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교회의 오늘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를 이루어 오기 위해 우리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 감당해 오신 헌신과 그분들의 기도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2.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크게 두 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의 종교적 가르침과 전통 속에서 나고 자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그분을 따른 제자들도 유대인이 대부분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기둥(2:9)으로 하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할 만한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은 할례와 안식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율법 체계와 종교적 관습들을 모두 지키면서, 그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볼 때 이들 유대계 그리스도인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그 결말이 다른 이들, 좋게 보면 유대교의 개혁자들이었고, 나쁘게 보면 유대교의 이단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이들이 바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계의 또 다른 한 축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이방인, 그러니까 비유대계출신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 집단입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종교적 관습과 관계없는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절대다수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유대교이 아니고,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박해받을 일은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흠이 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이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삼중의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첫째는 로마의 박해, 둘째는 유대교의 박해, 셋째는 같은 그리스도인들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의 박해입니다.

 

로마와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당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적대시하고 박해하는 상황은 문제의 심각성이 다릅니다. 초대 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주된 원인은 바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사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갈등의 내용은, 한마디로, ‘할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따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의롭게 된다고 했는데. 이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혹은 예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펼쳤고, 이를 통해 복음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민족,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선포되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울은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 칭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바울에 앞서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열었고, 그 일로 지금 고발자들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3.

 

복음 선교 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온 베드로에게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그들은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베풀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고넬료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베드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저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가 자세히 해명하면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이 금하는 음식을 먹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말하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인용했습니다. 이러한 해명 끝에 내린 베드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선물 받은 마당에, 내가 누구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셨던 것처럼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선물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그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록자는 이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하고 전합니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다 보면 합법과 위법의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을 자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는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떠올립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경계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이 개척자들은 경계를 넘고 담을 허물기 때문에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정치인들처럼 아슬아슬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정통과 이단의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하는 이들이 선교사들이요, 복음전도의 사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의 숙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앤드루 월스(Andrew F. Walls)라는 20세기의 유명한 선교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되어 온 역사가 아니라, 중심을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전개되어 온 순례의 역사랍니다. 갈릴리에서 지중해로, 지중해에 유럽으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유럽과 북미에서 지구촌의 남반부에 속한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기독교의 중심이 계속해서 이동해오는 과정이 바로 선교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복음을 문화 속에서 꽃피우려는 토착화의 노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토착화 한 현실로부터 떠나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려는 순례자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것이라, 월스 교수는 말합니다. 월스 교수의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교의 중심축이 유럽과 북미로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이동했으며, 이러한 흐름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경계를 넘어 순례길에 나선 것입니다.

 

한편, 선교는 이렇게 지리적 경계를 넘은 것만이 아니라, 복음을 기준으로 생각의 경계, 자기 의식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일종의 인식론적 탈경계성을 지향하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저는 주중 시간을 내서 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맡아 하는 강의들은 전통적인 선교학 과목이라기보다는 탈식민주의나 후기구조주의와 같은 현대사상의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선교의 의미를 성찰해 보려는 목적을 지닌 과목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과목들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저는, 선교는 그리스도교 경계의 맨 끝에 서서 길을 트기도 하고, 또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하는 일종의 전위대같은 역할을 한다고 종종 말합니다. 복음전도의 최전선에 선 이들이야말로 교회와 신학을 수호하는 동시에, 교회와 신학에 새길을 열어가는 이들이라는 사명감을 세미나에 참석한 이들과 함께 나누곤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지난 세기 가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개신교회의 10차례에 걸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통해,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야말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임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선교는 무엇인가요? 가난한 이를 돕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고, 낙심한 이들에게 복음의 새 희망을 불어넣는 일이 물론 선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천들을 가능하게 하는 선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넘어 만민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율법과 관습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일치된 세계를 바라보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이들이 선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좌우로 갈라진 시대에, 위아래로 갈라진 시대에,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차이와 편견과 차별을 넘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삶, 그것이 우리 시대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보는 오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인정할 수 없는 타인,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 자비와 은총의 눈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의 한계를 넘어, 지식과 경험으로 쌓아 올린 높은 편견의 벽을 넘어, 더 크신 하나님 안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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