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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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

 

본문: 시편 67:1-7; 요한복음 13:3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19.5.19. 부활절 제5)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1.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은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새 계명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유월절 바로 전날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날 일어난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시다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그 발을 깨끗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종이 해야 할 일을 주님께서 손수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했고, 놀란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시렵니까? 아닙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베드로는 종들이나 할 일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시는 상황이 낯설었을 뿐만 아니라,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굳은 마음을 녹이셨으며, 친히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4-15)

 

2.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높고 귀한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 생활인이 열심히 생활하는 이유, 그리고 부모가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쏟는 이유는, 대개 나와 내 자녀가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고 귀한 자리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고생을 사서 하라고 말하지 않지만, 꿈을 꾸는 이들은 스스로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 생활하면서 자기가 목표한 바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목표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목표가 지금보다 위를 향하고 있습니까, 아래를 향하고 있습니까?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더 못한 삶을 위한 것입니까? 물으나 마나 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다른 목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래를 향한 길이요, 기꺼이 손해 보는 길을 택하는 삶의 길입니다. 목표는 목표이되,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더 낮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더 겸손한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무슨 노력이 필요하지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요?’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래를 향해 가려는 노력은, 위를 향하려는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낮은 곳을 향해 사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사실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목표란 언제나 위를 향하는 것이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는 시대의 정신(에피스테메)을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각인시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길, 종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건 예수님이시니까 그렇고 나는 할 수 없다,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을 우러러보라고 종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5) 이것이 주님께서 몸소 종의 도를 행하신 이유입니다.

 

어느 성직자가 안식년을 갖게 되었답니다. 안식년이 되면 말 그대로 안식을 취하면서 그동안 자기 발전을 위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유학을 가서 경력을 늘리거나, 아니면 여행을 가서 여가를 즐기거나 하는 일로 안식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을 한 것입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 동안 휴게소 광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다니며 빗자루질을 하고, 대소변 묻은 변기를 닦아내고, 발자국 난 바닥 걸레질하면서 이분은 자신이 그동안 성직자의 신분으로 인해 신자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인사와 대접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동안 강론대에서 사랑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청소부로 일해 보니까 휴지는 휴지통에, 꽁초는 재떨이에 버리는 게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면 누군가는 그걸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과시할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습니다. 시기질투도 없습니다. 그게 참사랑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안식년에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한 신부,” 2005.12.25.)

 

3.

 

진정한 배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낮아지는 길을 스스로 택하는 데서 옵니다. 앎을 늘리는 것, 지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중요하고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배움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노자(老子)를 읽다가 마음에 담아 둔 구절이 있는데, “위학일익爲學日益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 하는 구절입니다. 앎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쌓아가기만 하는 것도, 덜어내기만 하는 것도 진정한 배움이 아닙니다. 배움은, 쌓아야 할 것은 쌓고, 덜어내야 할 것은 덜어내는 데 있습니다. 버려야 할 건 버리고, 꼭 붙잡아야 할 건 붙잡아야 인생의 참다운 진전이 있다, 저는 복음서와 노자를 읽으면서 그런 교훈을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위학일익 위도일손의 길입니다. 배워야 할 것 배워서 쌓아가고, 버려야 할 것 미련 없이 버리며 나아가는 삶의 길을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자비의 마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쌓아가고, 분쟁과 분열, 미움과 원망은 날로 덜어내며 온 세상 사람들을 편견 없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분은 남들이 부도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부정하다고 멀리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친교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나라의 잔치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낮아진 마음이라 가능합니다. 주인이 되셔야 할 분이 주인의 자리에 있지 않고, 몸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부족한 제가 주님의 일 한다며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제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서로 봐 주고 서로 인정해 주는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목사로서의 저의 역할은 저 혼자 잘났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에서만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리에서의 역할이 아니라면 목사의 일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요즘 같은 시대에는 별로 덕이 되지도 않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는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겸손한 분들의 서로 사랑의 마음으로 오늘의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 한 장로님을 제가 잊지 못하는데, 그분은 제 아버님보다도 연세가 많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사도 아닌 신학생에 불과한 저에게 꼭 존댓말을 사용하시고, 익명으로 여러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 당황한 베드로의 심정을 저는 그 장로님의 섬김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오셨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고, 우리교회가 있다고 믿습니다.

 

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이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오래된 계명이고,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전혀 새로울 리 없는, 그야말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온 계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 오래된 계명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왜 새 계명이 되겠습니까? 사랑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시혜적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몸소 종이 되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랑의 길,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15:13)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대신 죽으신 사랑이요, 섬김의 본을 보이신 사랑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그 누구에게서도 지금껏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랑, 자기를 낮추고 비움으로써 상대를 높이고 채우는 사랑, 주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너희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언제나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오래된 갈등을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120:6-7) 여기에서 사랑을 말해도 저기에서 미움을 가질 수 있고, 또 저쪽에서 평화를 원해도 이쪽에서는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 이러한 시인의 탄식은 서로 사랑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 일러줍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기를,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며 평화의 길이 멀다고 탄식하는 대신, 내가 먼저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 그것이 종이 되신 주님의 평화의 길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의 군사학자 베게티우스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깁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강력한 힘을 갖춰야,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갖춰야 평화가 온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다툼은 비슷비슷한 사이에서 일어나지 압도적인 차이가 있는 사이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강력한 무력을 갖추는 것이 역설적으로 평화의 상태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힘으로 눌린 이들의 분노와 탄식이 더 큰 갈등과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억누르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 없습니다. 강자의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 섬김과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지는평화만이 참된 평화를 가져옵니다.

 

5.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길은, 이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길,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써 먼저 낮은 자리에 임하신 주님의 길을 나의 길로 여기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먼저 손 내밀고, 서로 사랑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먼저 종이 되기를 청할 때 우리는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신비를 경험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길, 성육신하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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