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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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소명

 

본문: 시편 77:11-20; 누가복음:9:57-62

설교: 홍정호 목사 (2019.6.30. 성령강림 후 제3, 청년회 헌신예배)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벌써 2019년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한 해의 절반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7월을 맞이하는 오늘, 청년회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 멀리 지방과 해외에서 생활하는 청년들, 또 사정상 오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청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1.

 

오늘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그를 적잖이 감동시킨 모양입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이 율법학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대의 율법학자라면 배울 만큼 배우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는 사람일 텐데, 뭐 아쉬울 게 있어서 주님을 따라나서겠다는 걸까요? 혹시 이 사람은 예수님 무리의 생활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그의 말에 찬물을 끼얹듯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9:58)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누가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언급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이에게 먼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십계명 제5계명의 가르침에 따른 정당한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으니 따라 갈 텐데 그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공경의 예를 표하도록 잠시만 기다려 주십사 하는 청입니다. 안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장례 먼저 치르고 가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누가는 이 사람이 보인 반응을 전하지 않고,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마지막 장면도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의 대답과 여기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던 앞선 이와 달리, 그는 주님을 따라가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주님께 전달했습니다. 주님을 따라갈 텐데, 잠시만, 장례식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작별 인사를 전하고 오는 것이니, 아주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요청입니다. 설마 이 요청도 거절하실까요? 주님의 대답입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누가는 이 마지막 사람이 보인 반응도 전하지 않습니다. 이 세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는지, 아니면 낙심하여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9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말하자면 누가는 정답을 말해주는 대신,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

 

주님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고난을 자처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감수할 마음가짐이 먼저 바로 서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 손해도 감수하고, 기꺼이 희생도 하고, 때로 억울한 일도 감내하면서 복음을 위해 헌신할 마음가짐과 태도가 바로 서지 않으면, 그 길은 평안과 기쁨의 길이라기보다는 고생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받은 존경과 대접에 주목하면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유랑하는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해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생활로 인해 당신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먼저 진리에 굳건히 서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여기에서 칭찬받고 저기에서도 칭찬받는 삶은 불가능하다,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의 메시지가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오랫동안 주님의 일을 세속적인 일과 구별해 왔습니다. 성품성사(聖品聖事, Sacrament of Holy Orders)나 목사안수 같은 특별한 예식을 통해 성직으로 부름 받은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해 왔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중세의 제도와 질서가 차츰 무너지면서 새로운 개신교 윤리가 출현합니다. 이른바 직업소명론이라는 개신교 기독교 윤리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와 같은 구별된 이들만이 아니라, 농부나 기술자나 상인과 같은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직업은 각기 다를지 몰라도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일한다는 점에서 성직과 일반 직업에 구분이 없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직자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농부나, 구두수선공이나, 상인이나, 군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주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러한 부르심은 성직으로 부름 받은 것과 같다는 믿음이 개신교 안에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러한 직업소명론이 초기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분석한 사회학의 고전입니다. 이전에는 고작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했던 일들에 성직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겠지요? 돈 벌려고 일 할 때와 보람과 의미가 있는 일을 할 때, 어느 때 더 일을 열심히 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에 이윤을 앞세워 일할 때보다 일의 효율성도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더 많은 부가 창출되었습니다. 또 개신교인들은 대체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창출된 부가 낭비되지 않고 그대로 축적되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국가들이 근대사회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발전하여 번영할 수 있었던 초기의 한 원인이 된다는 분석입니다. 한 마디로,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게 되면서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3.

 

여기에서 두 가지 윤리가 충돌합니다. 하나는, 앞서 복음서에 등장한 예수님의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의 직업소명론입니다. 예수님의 윤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 머리 둘 곳도 없는 삶, 아버지의 장사도 치르지 못하는 삶,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구하지 못하는 진리에의 충실성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 이 윤리의 지향을 잘 보여줍니다. 반면, 개신교의 직업소명론은, 이 복음의 급진성을 상당히 희석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제 어떤 것을 포기하고 그만둘 것이 요청되기보다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더 잘 할 것이 요구됩니다. 굳이 성직자가 되지 않더라도 생활인으로서 주님의 일에 성직자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예수님의 윤리는 단절성을, 직업소명론은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사실, 신자로 살아가는 데 있어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필요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해 단호히 끊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에는 단호히 끊어내기보다는 기존에 하던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일을 보람과 의미 속에 지속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끊고 잇는 일이 자연스럽게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이 조화롭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신자로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곧 그 사람의 신분, 곧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곤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과 자기 존재를 분리합니다.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 하는 생각으로 직업에 상관없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이들과 즐겨 봤는데, 거기에는 노동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들이 자주 나옵니다. 장인이 사라지고 기술자들만 남은 시대에 진정한 장인을 보는 즐거움이랄까요, 물질적 보상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 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을 보면서 감탄과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사람들이 저런 걸 보고 기준이 달인이 되어서, 웬만한 노력을 가지고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처지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제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일이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시작한 일이든, 그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리면 일할 때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돈벌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으며 최선을 다할 때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고, 지역 공동체에도 없어서는 안 될 가게가 되는 것을 보면서, 오래된 직업소명론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직업을 단순히 생계수단으로 삼지 않고, 천직으로 여기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으로 여기게 될 때 그 일을 통해 자신과 가족과 이웃이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세속의 직업들은 성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그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성직이 됩니다.

 

4.

 

청년 헌신주일입니다. 청년 세대들의 시름이 깊은 시대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고, 일자리를 얻어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부모 세대가 얻은 경제적 보상보다 큰 보상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에 지친 청년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그래서 직업을 가지고 직업 안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일 밖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게 세워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불안감을 갖기 마련입니다.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내가 뿌린 씨앗이 돌밭에 떨어져 열매는커녕 싹이 나기도 전에 말라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염려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셨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하듯 그 일에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열매를 허락하시며, 우리의 일을 통해 영광을 받게 되실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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