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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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

 

본문: 시편 15:1-5; 누가복음 10:38-42

설교: 홍정호 목사 (2019.7.21. 성령강림 후 제6)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였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1.

 

오랜 편견으로 인해 복음서를 읽는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거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여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남자 제자들 못지않은 큰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복음서의 행간을 면밀하게 읽는다면, 그들 여자 제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도록 만든 든든한 조력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신 공생애 기간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꿋꿋하게 남자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자리를 끝까지 지킨 이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Amy Chua)에 따르면, 로마제국은, 역사상 융성했던 동서양의 제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관용’(tolerance)을 제국의 통치 방식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이민족들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했고, 분봉왕(client king) 체제를 통해 권력의 분권화와 지역통치를 체계화했으며, 무엇보다 제국의 통치에 편입됨으로써 로마가 이룩한 자유와 번영과 안정을 로마의 식민지들도 공유할 수 있다는 이상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관용을 통한 로마의 통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관용을 통치의 방식으로 적극 활용한 로마가 불관용으로 일관한, 그리고 매우 엄격하게 처벌한 범죄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의 체계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다양한 생각을 하는 것도 좋고, 지역통치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자유와 번영과 안정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제국의 체계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은 악으로 간주하여 불관용과 적대로 일관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평화가 약속하는 자유와 번영과 안정을 위협하는 인물로 낙인찍혀 십자가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제국의 체계 그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렇게 요주의 인물로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 곁을 지킨다는 것은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로마는 십자가형을 당하는 이들 주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동조자로 간주해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자칫 감정의 격동으로 소요사태가 일어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그러니 그 주변에 있다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여자 제자들은 그 위험한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복음서만이 아닌 네 개의 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하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들은 이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들, 그리고 남자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 소식을 전한 이들도 모두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독자들은 남성중심적 사회의 오랜 편견 속에서 이런 사실들을 주목하지 못한 채 여성을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부수적 지위에 머무는 존재로 여기거나, 예수님을 유혹하여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존재로 부정적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거나,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누가는 네 명의 복음사가 중에서도 예수님과 여자들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실 때에 열두 제자만 있었던 여러 여자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 여자들 중에는,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여자들과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병이 치유되고 감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헤롯의 청지기로 일하는 구사라는 인물의 아내 요안나가 그 여성 제자들 무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이 여인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8:3)고 전합니다.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인 마르다와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이었습니다. 누가는 남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와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가 서로 대비를 이루도록 복음서를 구성했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전하려면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이 대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늘 본문은, 이런 이유에서 남자들이 주인공인 사마리아 사람의 교훈 바로 뒤에 배치되었습니다. 아무튼 누가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예수님의 든든한 조력자인 여성 제자들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요한은 이 자매와 나사로가 함께 사는 집에 베다니에 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 오실 때면 근처 베다니에서 지내시곤 했는데,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 일행이 편안히 지내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음식 배달 어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귀한 손님을 집으로 모셔 들이는 일은 음식 재료준비에서부터 요리와 대접까지 모든 과정을 손수 준비해야 하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무리를 이끌고 다니셨기 때문에 예수님만 따로 모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 주변의 제자들까지 집으로 모셔 들여 대접하려면, 그 집은 크기도 꽤 커야 하고, 대접할 형편도 그럭저럭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식탁교제, 밥상공동체의 나눔은 이렇게 자기의 공간을 내어주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여성들의 숨은 헌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날도 예수님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기는 여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따뜻한 환대와 쉼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도 제때 음식이 나갈까 바쁜 마당에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와서 따지듯 말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다는 바쁘기도 바빴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일은 누가 다 하고, 자기는 마치 예수님의 문하생인 양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이요. 마르다 조차도 마리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자 제자들이 앉아 가르침을 받는 예수님의 발치가 아니라, 시중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손님을 모셔들인 입장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것보다는 시중을 들어 예수님 일행을 섬겨야 한다는 마르다의 생각은 옳은 것이고, 마리아를 보내주시라는 요청 또한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누가는 이 말씀을 들은 마르다의 반응은 전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3.

 

누가는 마르다가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에서 접대하는 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이나봉사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마르다는 봉사하는 일로 바빴습니다.

 

봉사’,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네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의 네 기둥이란,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디다케, 그리고 코이노니아입니다. 케리그마란 말씀의 선포, 곧 예배와 설교입니다. 디아코니아란, 앞서 말씀드린 섬기는 일, 봉사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직분인 집사(diakon, deacon)는 이 디아코이나를 위해 세워진 일꾼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의 직제 가운데 가장 먼저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다음은 디다케입니다. 디다케는 교육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규범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마지막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앞선 세 개의 사명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교회의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주인도 노에도, 종도 자유인도 없이 하나 된 이들, 그들이 코이노니아를 이룬 에클레시아, 즉 교회입니다.

 

마르다의 일은 교회의 네 사명 가운데 디아코니아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봉사섬김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자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보람과 기쁨이 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봉사만으로 든든히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과 봉사, 그리고 교육과 친교가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주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하는 봉사가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케리그마를 경청함으로써 주님의 사명을 이루어가고 있는 마리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케리그마’, 말씀의 선포와 경청, 그리고 받은바 말씀을 삶에서 이루어가려는 진지한 노력은 신앙생활에 있어 초석과도 같습니다. 케리그마 없는 디아코니아, 즉 말씀의 경청이 없는 봉사는 자칫 방향을 잃은 열심히 되기 십상입니다. 직장생활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만나기 싫은 상사는, 원칙도 없고, 명민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밤낮없이 한결같이 성실하긴 한데, 방향이 엉터리라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 참 힘들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케리그마의 방향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봉사와 교육과 친교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거나, 아예 잘못된 열심히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당장에 마르다보다 주님을 모시는 정성이 부족해 보이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얼마간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좋은 몫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심을 부리는 것은,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만큼 오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케리그마의 방향성이 바로 선다면, 열심은 때를 만나 무르익을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선교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시대, 어떤 지역의 교회보다도 주님의 일에 열과 성을 쏟은 교회로 자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다니면서 보는 좀 큰 교회들은 대체로 전지구적인 사이즈를 자랑하는 교회들입니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 이렇게 큰 교회들이 밀집해 있는 시대와 장소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긴 열심으로 치자면 한국교회 교인들만큼 봉사 많이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선 교인들이 또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아마 우리의 봉사만큼은 칭찬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한국 개신교회의 민낯은 열심히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교회를 섬기는 봉사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케리그마의 왜곡과 결핍 때문입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서 정치이념이 선포되고, 경제적 번영신화가 선포되고, 각종 처세술과 세속의 지혜가 설파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케리그마의 결핍이 오늘날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교회의 근본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주님은 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되려면 복음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들어야 합니다. 듣되, 흘려듣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실천의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목사만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말씀을 경청하는 좋은 몫을 택하고,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는, 주님의 말씀처럼,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마리아처럼 좋은 몫을 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엉뚱한 일에 부리는 열심을 거두어들이고, 주님의 일, 생명을 살리고 더불어 풍성한 삶을 누리는 복음사역에 더 많이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쌓인 말씀의 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맡겨 주실 때에 아멘하며 나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처럼, 생명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아 복음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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