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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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사람에게

 

본문: 시편 85:1-13; 누가복음 11:1-13

설교: 홍정호 목사 (2019.7.28. 성령강림 후 제7)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누가는 마태복음 6장과 7장에 나오는 내용을 한데 묶어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유대의 종교문화 속에서 자란 제자가 기도하는 법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해 뜰 무렵, 오후 3시경, 해질 무렵), 시간을 정해 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6:10). 유대교의 전통은 그리스도교로도 이어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루 세 번, 아침 6시와 낮 12, 그리고 저녁 6시에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치는 삼종기도(angelus)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삼종기도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기도는 하루 세 번 종이 울리는 동안 바치는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는 기도의 양식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기도는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신명기 64절과 5절의 말씀을 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렇게 시작된 기도는, 선 채로 낭송하는, ‘아미다’(amidah)라고 부르는 열여덟 개의 전례기도(tefillah)로 이어집니다. 아미다는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회당 예배에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회당을 통해 어려서부터 이런 기도의 전통을 익히며 자랐을 유대인 제자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기도를 하고 있는데 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요? 그분의 기도에는 무언가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그 다른 면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에서 기도”(1:35)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벽 미명에 홀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일상이셨으며, 그분의 권능의 원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기도를 드려야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다는 점이 다릅니다. 말하자면, 특별히 기도 시간을 정한 말씀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 패턴의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베일리, 2016, 150). 또 하나는 군더더기 없는 짧은 말로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6:7-8)

 

그런데 이 말씀은 한편으로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끔 밤새 기도를 하시곤 했기 때문입니다. 빈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밤새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 가능합니다. , 침묵과 경청을 기도에 포함시킬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와 그분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 그분의 기도는 믿음 가운데 바치는 간결하고 진실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이것이 꼭 바쳐야 할 기도를 알려 주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긴 기도의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침묵으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마음의 결단을 새기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듯 두 가지 점에서, 첫째는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지 않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기도하셨다는 점, 둘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의미 없는 기도를 드리시는 대신 간결하고 진솔한 기도를 드리신 후에 더 많은 시간을 침묵과 경청으로 보내셨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제자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 스타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그분의 기도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2.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정말로 간결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단지 아버지라고 간결하게 부르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동의 문화에서 존경할 만한 이의 이름 앞에 긴 수식어를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페르시아 학자가 레바논의 선교사이자 학자인 반다이크(Cornelius VanDyke) 박사에게 존경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면서 이런 편지를 첨부했다고 합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각하, 만인이 존경하는 영혼의 의사요, 종교 철학자이며 당대의 유일무이한 지식인이요 지극히 박식한 분으로서 누구도 감히 따라갈 자가 없는 미국인 코넬리어스 반다이크 박사님께 이 기념품을 보냅니다. 이 기념품은 각하의 고매함과 선하심을 기림이요, 어떤 칭호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각하께 드리는 것이니, 각하는 지식을 선양하신 분이요, 완전함을 세우신 분이요, 숭고한 자질을 소유하고 우러를 인품을 지닌 분이요, 온갖 미덕에 뒤덮인 창공의 극점이요 과학계의 중추요, 여러 걸작을 짓고 견고한 기초들을 만드신 분이요, 영혼과 여러 영역의 내밀한 실체를 이해함과 통달하신 분이요, 지극히 비천한 자들이 각하의 존함을 종이 위에 금으로 쓰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빛으로 기록해야 마땅한 분이십니다.”(베일리, 2016, 148 재인용)

 

어지럽죠? 칭송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한 수 배웠습니다. 존경할 만한 분에게 이런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는 문화에서, 하물며 하나님께는 얼마나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관습을 따라 이와 비슷하게 기도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아버지...” 저는 이 수식어들이 처음에는 진실한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미가 사라진 관용어구가 되어버린 것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를 시작하십니까? 유대인들은, “들으라! 이스라엘아!” 이렇게 기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자비하신 하나님, 좋으신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하는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냥 무의식에 따른 기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데 있어 그 어떤 수식어도 없는 단 하나의 낱말, ‘아버지’(abba)라는 낱말로 충분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그랬는데, 오늘 누가는 그것도 길다는 양 그냥 아버지그랬습니다. “아버지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높여 부르는 칭호로 아버지면 족하다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마디입니다.

 

3.

 

하나님을 정말로 아버지로 믿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다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생활의 비유로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1-13) 이 구절을 마태는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가장 좋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믿음에서 출발해서 이 믿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순례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각종 지혜들은 사실 양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좋은 고기가 있으면 거기에 별 양념하지 않고 구워 먹어도 그런대로 먹을 만하거나, 심지어는 맛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좋은 고기에 비유하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양념을 구비해 두었어도, 그 양념만 먹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기가 좋아야 양념이 빛을 발합니다. 복음의 말씀이라는 고기가 건강하고 충실해야 그 위에 곁들이는 양념과 향신료들이 빛을 발합니다. 고기가 부실하거나 썩었으면, 그 양념은 오히려 상한 고기를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에 있어 이 좋은 고기와도 같은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 밖의 양념들은 별로 소용이 없거나 해악이 될 뿐입니다.

 

신앙인이 정말로 힘써야 할 것은, 복음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믿어지도록자기를 내어놓는 것이고, 그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뜻 가운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세례 받는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 할 때 항상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 맡긴 삶이오니, 주님께서 그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고, 주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옵소서.” 우리가 성찬을 할 때 부르는 찬송도 이런 의미에서 정한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 맡기나이다.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 맡기나이다.” 이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지만, 그 어떤 이론과 경험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믿음입니다.

 

4.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아버지께 맡긴 인생입니다. 세상 염려와 근심에 쌓여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께 맡긴 삶이오니,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옵소서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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