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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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

 

본문: 시편 107:1-9; 누가복음 12:13-21

설교: 홍정호 목사 (2019.8.4. 성령강림 후 제8)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여덟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1.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 와 유산 분배 문제의 해결을 청원합니다. 청원한 이는 형제 가운데 동생입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가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는 한 아버지의 유산은 장자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동생이 유업의 일부를 얻으려면 형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아우는 지금 랍비이신 예수님께, 형에게 압력을 넣어 유산을 나누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이른바 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한 요청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예수님의 초점이 공정한 분배를 통한 정의 실현에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아우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해결책을 바라며 찾아 온 이 아우는 예수님의 핀잔을 듣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이것이 공정한 분배를 위한 해답을 제시하시는 대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입니다. ‘이 사람아’, 이렇게 부르신 데서 거리감을 느낍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이 호칭에 예수님의 불쾌감이 담겨있다고 보았습니다. 왜 불쾌감까지 느끼셨을까요? 정의를 요구하는 그의 속내가 정의실현을 통한 공공선의 증진에 있지 않고, 정의를 명분 삼아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의 이 정당한 요청에 퉁명스럽고 불쾌감마저 담긴 응답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의가 문제가 아니고, 정의를 명분으로 삼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탐심(貪心)이 문제다, 주님은 이 탐심을 청원 문제의 본질로 보신 것 같습니다. 곧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런 추측에 확신을 더합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조금 전 재산분배를 청원한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니, 왜 저런 말씀을 하시지? 형이 독식한 유산을 나누도록 해 달라는 내 요청이 잘못된 건가? 율법의 부조리함을 당당히 비판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찾아왔더니, 장자 편향적인 율법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안 하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심쟁이로 몰아세우시다니!’ 그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이 이 아우의 입장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2.

 

이런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유산 분배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정의를 명분으로 삼은 주장의 이면에 탐심이라는 독버섯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정의실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차별을 관습으로 정당할 수 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관심은 세상에 드러난 문제의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해결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해결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을 비유로 든다면, 겉으로 드러난 증상의 치유를 위해 힘쓰는 대신 생활습관의 변화를 통해 몸의 체질을 개선하고, 면역력을 키워 질병과 싸우는 근원적 힘을 길러내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건강을 위해 개선해야 할 생활습관이 무엇인가요? ‘탐심입니다. ‘탐심의 문제가 정의에 관한 표면적 주장 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아우의 정당한 요청과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탐욕이라는 주제를 이 재산분배 요청 사건의 본질로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탐심이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눈앞에 당면한 과제인 재산분배 문제가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이 사람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을 근원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식을 찾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 다른 문제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란 사실을 주님은 잘 아셨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시면서도 그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3.

 

주님은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차고 넘치기는커녕 너무 없어서 걱정인데요생각하는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부자만을 겨냥한 말씀이 아닙니다. ‘탐심을 지닌 저와 여러분과 같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가난하다고 탐심이 없습니까? 저를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로 인한 억압의 지속은 가난한 이의 마음을 옥죄어 탐심을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재물을 많이 쌓아두고 살면 걱정을 상당히 많이 덜어내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재물이 삶의 기반이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이긴 합니다만,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세속의 지혜요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윤리는 그런 세속의 지혜와 믿음을 거스릅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반석이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윤리, 특별히 경제윤리의 핵심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가 있었는데, 밭에서 소출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소출을 둘 곳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지금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지어 거기에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기로 결심하고, 문제가 해결되어 속 시원한 마음으로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생명은 선물입니다. 권리가 아닙니다.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살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은, ()의 명령(), 즉 살라는 명령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살라는 명령을 받고 생명선물로 받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자살을 금기시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생명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생명은 살라는 명령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되, 영원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진 것일 뿐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할 일은 귀한 생명을 선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나와 이웃, 그리고 온 세계의 생명을 더 잘 가꾸는 데 있습니다. 살 권리 증진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이러한 믿음에 기반한 것이지, 삶을 인간의 권리로 여기는 세속적 휴머니즘의 입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4.

 

생의 명령을 성실히 잘 수행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왕이면 많은 소출을 얻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맡은 바 직무에 성실히 임했음에도 소출이 별로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요 누굴 탓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이왕 밭에 씨를 뿌렸으면 잘 자라 오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도록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되,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성실히 직무에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부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는 건 거저 얻어진 게 아닙니다. 특히 농사일은 땀 흘린 만큼만 보상이 따르거나, 흘린 땀에 못 미치는 결실을 맺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농사일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덜 자고, 덜 쓰고, 덜 입고, 더 열심히 생활하면서 자기 삶을 가꾸고, 성실히 생활한 결과입니다. 남의 것 빼앗아 부자가 되지 않고, 자기 밭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니, 그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이런 모든 장점들을 상쇄시켜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언제가 자기를 중심에 놓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기에게 모든 초점이 있습니다. 먼저, ‘많은 소출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는 궁리를 혼자 하고, 혼자 답을 내립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하거나,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자기 생각을 수정하거나 할 여지 없이, 혼자 궁리하고 혼자 답을 내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이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답을 내려, 혼자 실행한 결과가 더 좋았다는 반복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이들 가운데 자기가 곧 인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 부자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어렵게 일어났기 때문에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그는 혼자말합니다. “‘내 곳간을 헐어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너는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이렇게 이 부자의 삶에 타인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웃에게 곁을 주지 않고, 오직 자기, , 나의 것, 나의 소유에 온통 관심을 쏟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결정판으로 자기가 지은 성채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꿈꿉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는 삶은 좋은 삶입니다. 예수님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 것의 근거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지 않고, 자기의 문제해결 능력에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이 성실한 부자는 그렇게 자기가 살아온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처럼 임합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순간 그가 쌓아 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욕심 부리고, 다투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얻어낸 모든 결실들이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날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이 부자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교회에 헌금을 바치라는 뜻입니까? 주의 종을 잘 섬기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4세기의 서방신학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떠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베풀었던 긍휼만이 우리를 따라올 뿐이다.” 또한 이 암브로시우스의 제자이자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가 자기 곳간보다 더 안전한 저장고임을 깨닫지 못했다.”(베일리, 472쪽에서 재인용)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범사에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 우리 인생에 허락된 선물들을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드리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다음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정말로 힘써야 할 일은, 성실히 일해서 얻은 결과물로 내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오늘을 주님의 날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풍족한 인생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쌓는 삶”, 긍휼과 자비가 일상이 된 삶에 있습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힘씁니다.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고,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는 당당한 자기 길을 꿈꾸고, 내 말이 곧 정의가 되는 우주의 중심, 주체로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가 잊지 말아야 할 근원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이 실상은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삶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주체성의 결과가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것, 수동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신자의 삶은 살라는 명령을 주신 분의 명을 받들어 살 때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지은 내 곳간의 높은 담장을 허물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우리의 담장을 넘어 나아가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로 살기로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선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의 주인이신 그분만을 높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손 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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