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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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열매

 

본문: 시편 71:1-6; 누가복음 13:6-9

설교: 홍정호 목사 (2019.8.25. 성령강림 후 제11)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이며,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는 왕국절의 시작입니다. 아직 여름입니다만, 처서를 지나며 아침저녁으로 가을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여름 더위 가운데에서 가을이 오고 있듯이,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왕국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의 복음은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이 본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앞선 본문과, 안식일에 등 굽은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그렇듯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건 언제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쉽고 간결합니다. 그분이 말씀을 직접 듣는다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적 장소적 간극은 그분의 쉽고 간결한 말씀을 수많은 해석()과 오해()로 채워왔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질곡을 겪어 왔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비유는 세 가지 관점에서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포도원주인의 관점입니다. 둘째는 무화과나무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포도원지기의 관점입니다.

 

먼저, 우리의 상식에 가장 가까운 해석은 첫 번째 관점, 포도원주인의 관점입니다. 어떤 포도원주인이 자기의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관상용이나 취미로 심은 게 아니라 열매를 보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심었습니다. 그런데 삼년 째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잘라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이 나쁜 사람인 걸까요?

 

오늘 우리는 농경사회를 살고 있지 않으니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잘 체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 볼까요? 포도원주인인 여러분이 어디에 투자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심심한데 투자나 해볼까 해서 한 게 아니고, 아끼고 아껴서 어렵게 마련한 종자돈으로 큰 맘 먹고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삼년이 가도 기대했던 수익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큰 손실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 돈으로 다른 데 투자를 했다면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니 그렇게 다른 데 투자한 이들은 이미 큰 수익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화나죠. 열매를 볼까 해서 투자를 했는데, 3년 동안 시간만 버리게 되었습니다.

 

,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그 투자를 계속하시겠습니까? 펀드매니저가 됐든 부동산업자가 됐든 자산을 맡은 이에게 말해서 정리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포도원주인의 행동은 합리적입니다. 요즘 같으면 3년이 아니라, 3개월 안에 정리했어야 할 겁니다. 3년을 무작정 기다리면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투자를 완전히 망쳐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포도원주인은 상황을 흐지부지 넘기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실행을 지시했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은 다른 포도원도 몇 개 갖고 있지 않을까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심는 일을 사람에 비유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선한 뜻을 갖고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해를 돕고, 두 해를 돕고, 세 해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어렵사리 제공한 호의를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호의를 그만 베풀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되려 비난이 돌아옵니다. 사람이 변했다느니, 초심을 잃었다느니, 갑질을 한다느니 등등 황당한 말들이 화살이 되어 돌아옵니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걸까요? 숙고 끝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가는 끝을 모르고 이용당할 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삼 년이나 관계에 공을 들였는데, 돌아오는 건 감사나 인정이 아니라, 비난과 원망뿐이라면 그 관계는 일찍이 정리했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닌가요?

 

여기까지 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본 포도원주인의 관점에서 읽은 본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첫 번째 관점에 공감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농경사회에서 정보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3년이 3개월이 되고, 3초가 되는 일상 속도에 큰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보람의 결실을 얻기 바라는 마음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첫 번째 관점이 아니라, 두 번째 무화과나무의 관점, 그리고 세 번째 포도원지기의 관점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 관점에 머문다면, 지금까지 드린 얘기는 단지 투자나 관계에 관한 처세술에 머물고 맙니다. 복음은 세속의 지혜를 넘어선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생활에서의 눈에 보이는 성공보다 더 근원적인 성공,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

 

그러면 이 비유를 두 번째 무화과나무의 관점에서 읽으면 어떨까요? 이 나무도 할 말이 많습니다. 같이 심긴 옆 나무들은 잘 자라고, 열매도 잘만 맺는데, 왜 유독 나만 이럴까, 나무가 생각을 한다면 이런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요? 또 이 나무에는 문제가 없는데 나무가 심긴 땅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뿌리를 든든히 내리려고 하니, 땅속 보이지 않는 돌들이 뿌리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땅에 심겼다면 이렇게 몇 년이 가도록 열매 맺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악조건을 극복하며 천천히 성장하는 중인데, 느닷없이 주인이 나를 잘라버리라고 합니다. 악조건 속에서 자란 나무의 과실이 더 달고 좋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인은 이미 생각을 굳혀서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이 나무는 억울하고 슬픈 마음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그래서 열매는 더더욱 안 맺힙니다.

 

우리는 포도원주인의 입장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나무의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단기간 고효율의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엊그제 가전제품을 하나 샀습니다. 광고해서 익숙하고 품질도 좋은 제품을 사면 좋겠지만, 그런 건 비싸서 배제했습니다. 구매를 마음 먹고 제일 먼저 검색한 단어가 뭔지 아세요? ‘가성비입니다. ‘가성비’, 즉 비용 대비 성능이 가장 좋은 상품을 찾는 것, 싸면서도 좋은 것을 갖겠다는 상충되는 욕망이 가성비라는 낱말을 우리 시대의 유행어로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물을 대하듯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일상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일 당 백을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기 몫을 넘어 일 당 백을 하면 그만큼 다른 데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서적인 문제가 생긴다거나, 가족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소진증후군이 생겨 정말로 힘써야 할 때 지쳐 나가떨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들이 생깁니다. 또 심각하게는, 안전의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할 중요한 직무를 비정규직이나 외주로 돌리면서 위험을 시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가성비’, ‘일 당 백과 같은 저비용 고효율의 관념이 적용되는 것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훌륭한 투자자인 이 포도원주인의 저비용 고효율 관념에 걸려 곧 잘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3.

 

이때 세 번째 관점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서가 강조하는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포도원주인도 무화과나무도 아닌, 포도원지기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땅만 버리는 이 나무를 잘라버리라는 화난 주인의 단호한 목소리에 맞서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저는 이 목소리가 예수님의 목소리요, 성령님의 목소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율법주의적 엄숙주의과 종교적 형식주의에 익숙한 청중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비유를 듣는 이들은 하나님을 포도원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면 잘려나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의 일들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지내던 이들은 이 엄격한 포도원주인의 목소리를 자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잣대에서 죄인으로 여겨진 이들, 다시 말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인생들에 대해 지금 하나님께 대신 간청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까지만 그냥 두십시오. 제가 잘 돕겠습니다. 이번까지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잘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열매 맺지 못하면, 그때 가서 찍어 버리십시오.’

 

여기에서 내년에 열매 맺지 못하면 찍어버리라는 말씀은, 이 포도원지기가 주인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이지 본심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강조점은 이 나무를 살리는 데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마지막 추수 때까지 같이 자라도록 그대로 놓아두라’(13:24-30)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단 그대로 자라게 두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알곡은 곡간에 들이시고, 가라지는 묶어 불태워버리실 것이니, 알곡 키우는 데 매진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알곡이고, 저이는 쭉정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고, 저이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다,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추수 때 곡간에 들어갈 것이고, 나는 열매 맺는 나무이니, 쭉정이는 지금이라도 뽑아버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른 나무를 위해 당장에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뼈아프게 자각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러분과 제가 쭉정이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이만큼 살게 하시고, 알곡으로 자라지 못했으나,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심판의 불을 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믿음으로, 은총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개신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대해 주시고, 나는 흠결이 많으나, 하나님은 흠 많은 우리를 즉시 잘라버리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 이것이 우리 개신교가 믿음과 은총을 줄곧 강조해 온 배경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관점 모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어느 한 관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누구를 만나느냐,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주인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나무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읍소하는 포도원지기의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변함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각자의 삶의 나무에서 저마다 아름다운 결실맺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제 역할을 다 하고 떠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떻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어떤 나무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화과나무 열매만 귀한 것이라는 생각과 결별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무화과나무 열매가 귀하다고 해도, 내가 무화과나무가 아니면 무화과나무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평생 무화과나무 열매만 바라보며 사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평생 무화과나무 열매만 바라며 살기보다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 그리고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를 먼저 살펴 알아야 합니다. 큰키나무도 있고, 작은키나무도 있습니다. 매년 잎이 떨어지는 나무도 있지만, 늘푸른나무도 있습니다. 잎이 뾰족한 나무도 있고, 넓은 나무도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이렇게 다양한 마당에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이 저마다 다르고 다양한 것이 창조의 이치이자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다양하게 창조하셔서 제각기 그 쓸모를 다하게 하셨지만, 세상은 우리를 단일한 잣대로 재고 잘라버리려 합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위한 청원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도와 우리 인생의 나무에서 때에 따라 저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우리 인생의 무늬 그대로, 풍성한 열매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우리의 격려자이시며 위로자가 되시는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영글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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