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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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자리

 

본문: 시편 81:1-6; 누가복음 14:7-14

설교: 홍정호 목사 (2019.9.1. 성령강림 후 제12)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가복음 14장입니다.

 

1,

 

예수님은 어느 바리새인파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의 위선을 꾸짖으시며 그들과 갈등을 빚으셨지만, 그들 모두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흠모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이 아니라, 바리새파의 지도자라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껄끄럽습니다. 바리새파 지도부는 예수님이 율법체제를 위협하는 인물이기에 제거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초대했을까요?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중동문화를 깊이 연구한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마을 사람들을 식사에 손님으로 초대해 함께 먹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신학적 견해를 조사하곤 했습니다(베일리, 2016: 482). 나눔과 친교, 경청이 식사초대의 주목적이었다기보다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죠. 식사자리를 빙자해 초대받은 이의 불온한 생각을 떠보고,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도 하는 등 종교지도자들의 식사초대는 다양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격의 없이, 그리고 장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행해진 예수님의 식탁교제와는 다른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파 지도자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내를 모르셨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종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파놓은 함정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는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예수님은 당신의 평소 믿음대로 행하셨고, 병자를 고쳐주신 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병에 걸린 이의 절박한 심정보다 이를 종교적 올바름의 잣대로 활용하는 이들의 굳은 마음과 위선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일이 일어난 뒤에 예수님께서 그 불편한 식사자리에 함께 있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

 

그 식사자리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였나 봅니다. 아무 데나 앉으면 되지 그럴 일이 있나 싶지만,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도 꽤 신경이 쓰이는 일입니다.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앉는 자리가 단순히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인들도 때로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일전에 선배 목회자 한 분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는데 내용인즉, ‘내가 저이보다 선배인데 왜 내 이름이 더 뒤에 넣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어느 분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제가 목사님이라고 써서 보냈더니, ‘나는 박사이니 다음부터는 박사라고 불러달라는 답신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본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 그분에게는 제가 꼭 박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을 때, 가서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예 맨 끝자리에 앉으면 초대한 이가 와서 알아서 자리를 정해 줄 테니, 먼저 상석에 앉았다 나중에 밀려나는 수모를 당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자리에 앉아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11) 잔치에서 자리를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잔치에 초대한 주인이 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하객으로 참여한 이상 우리는 주인이 마련한 자리에 앉아야지, 마음대로 상석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신자인 우리에게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이신가요? 누가 이 인생이라는 잔치의 주관자이신가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앉아야 할지는 세상의 주인이시고,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지, 높은 자리에 가고 싶다고 내가 알아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신 분은 이 자리에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모두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잠시 세상에 머물다 떠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초대하셨으니, 그분이 정하시는 자리에 가서 앉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앉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자리가 우리 인생의 자리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그 사람이 지닌 역량보다 스스로를 더 높게 평가하여 감당 못할 일을 자꾸만 벌이다 결국 주변 사람들이 뒷수습에 고생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충분히 그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데도,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재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겸손은 남들 앞에서 비굴하게 굴거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식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내신 그 모양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것,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겸손의 모양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메시지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너희가 너희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용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흙수저라 안 된다, 신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왜 안 됩니까? 하나님이 된다고 하시면 되는 겁니다. 반대로, 나는 금수저라 다 되겠지, 왜 됩니까?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시면 누가 봐도 될 것 같은 일이라도 안 됩니다. 인생이라는 잔치의 주관자,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다.

 

이런 말은 듣기에 따라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고, 사실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자칫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그렇게 오용되고 있는 사례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정해진 질서에 따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을 무조건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신앙적 권위를 부여하자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잔치이며, 우리는 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된 인생이라는, 삶의 이 수동성(passivity)’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신자로서의 삶의 기본에 속한다는 말씀을 강조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풀려 더 큰 존재로 보이려는 욕심과 결별하면, 하나님이 때에 따라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3.

 

예수님의 잔치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잔치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의 잔치는, 잔치라는 이름의 상호 감시와 검열의 자리요, 유유상종(類類相從)하는 권력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교환의 매개체입니다. 그 자리에서 돋보이면 출셋길이 열리는 것이죠. 반면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잔치는 나눔과 사귐의 자리요, 한 사람을 희망으로 일으켜 세우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예수님의 잔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으로 결국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기중심의 잔치가 아닙니다. 그분의 잔치는 철저하게 이웃이 중심이 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중심이 되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사회적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주는 교환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잔치에서는 조만간 돌려줄 것이 있는 이들이 초대받아 서로의 이익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잔치에서는 돌려줄 것이 없는 이들이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하면서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며 사심 없이 격려하고 세워줄 때 우리 가운데 열리는 세계입니다.

 

4.

 

교우 여러분, 신자인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너희가 너희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도 전해드렸습니다. 신자의 자리는 큰일, 유익이 될 일에만 힘을 쏟는 자리가 아닙니다. 큰일, 중요한 일, 득이 될 일이라서가 아니라, 맡겨진 일이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신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당신에게 한 것으로 여겨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인생의 힘입니다. 바라기는 스스로를 높이는 대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삶을 기대하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유익이 되는 일이든 아니든, 맡겨주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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