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15 댓글 0

아시는 주님

 

본문: 시편 139:1-12; 누가복음 15:1-10

설교: 홍정호 목사 (2019.9.8. 성령강림 후 제13)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13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시편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시인은,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하는 고백으로 이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시고,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하려는 말까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 그런 하나님께서 내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손을 얹어 주셨다, 이것이 오늘 시편 저자의 고백입니다.

 

나를 샅샅이 아는 이가 있다’, 여러분은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타인를 샅샅이 안다는 것, 혹은 타인을 그렇게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합니다.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어 왜곡은 이해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은 언제나 한계를 지닙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란 타자에 대한 지식을 주체의 경험적, 인식론적 지평 안으로 환원시켜 소화해 낸 결과물입니다. 나는 사실그 자체를 보고 이해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볼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보고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지적으로 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앎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여러 속성들, 무한에 가까운 타자의 지평을 주체의 제한적 자기 인식의 틀로 환원시켜 그것을 이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탄생하는, 대상에 대한 한계적 인식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순간에도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의 인식의 한계 안에서 제 얘기를 듣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같은 말을 같은 자리에서 들어도 해석과 강조점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 인간의 제한적인 인식의 지평으로 환원시켜 이해한다는 것은 불완전할뿐더러 지극히 부분적인 이해에 머물 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즉, 신이라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들, 그러니까 고작해야 신학일 뿐입니다. 가끔 저에게 전도 이메일을 보내거나 교회로 찾아오기도 하는 각종 이단/사이비 단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기성 교회의 이해보다 탁월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풀어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주장의 한계를 성찰해 볼 마음도, 그럴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좁은 경험과 인식의 지평으로 구겨 넣은 채 그것만이 참되다고 믿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런 신앙은 차라리 갖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단/사이비들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스로를 정통 신자로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대상에 대한 자기 인식의 한계를 성찰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이들이 많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이해라 할지라도, 믿을수록 대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인정의 범위를 축소하고, 심지어는 혐오와 배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인식, 혹은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이해란, 앞서 길게 말씀드린 대로, 명확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작용이기에, 우리는 타자를 아무리 샅샅이살펴본다 한들, 그를 다 알 수 없다는 것, 오직 안다는 믿음을 갖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긴 얘기를 드린 이유는, 오늘의 시편 본문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시 처음에 드린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를 샅샅이 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인식과 경험의 한계 안에서 나를 안다고 믿는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믿는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다는 이 믿음이 우리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한길을 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라는 믿음, 그리고 단순히 아실뿐만 아니라,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손을 얹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은 우리 인생의 든든한 반석이 됩니다.

 

나를 알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신나는 일 아닙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정을 일일이 다 아뢰지 않아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심정으로 기도를 올리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믿음을 갖게 된 시인은 노래합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측량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해한다는 것이죠. 이해 가운데에서도 가장 과학적인 이해, 즉 수치로 환산 가능한 이해(calculability)를 말할 때 측량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다 알고 계신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그러한 계산적인 이해가 무색해지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신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머리로 알고 이해하는 지경을 넘어서, 그분의 존재 그 자체와 만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는 그분의 손 안에 있다는 깨달음,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쫓기는 환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그분의 손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깨닫고, 그 놀라움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

 

다윗은 사울왕의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적대자 사울을 죽일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때 사울을 제거했더라면 적어도 사울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차가운 돌베개를 베고 외로이 잠이 들 때 적대자 사울을 처단할 기회를 번번이 날려버린 자신을 원망한 순간이 없었을까요? 왜 없었겠습니까? 다윗도 인간이기에 그런 번민이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원망이나 후회 대신 믿음을 택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환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샅샅이 아시고, 내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손을 얹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으로 자기가 딛고 선 자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거기에 계시고,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신다이것이 적대자 사울에게 죽음으로 앙갚음을 하는 대신 믿음을 택한 다윗의 고백입니다.

 

어둠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어둠이 갑자기 들이닥쳐도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믿음으로 인자무적(仁者無敵)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적은 여전히 거기에 있되, 그에게는 이제 겨룰 만한 적은 없습니다.

 

4.

 

우리를 환히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믿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주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는 굳건한 믿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나를 샅샅이 아시고, 내 생각과 행실을 두루 살펴 알고 계시며, 이로써 나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믿음이 전부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를 알고 계시며, 나는 아시는 주님의 손 안에 내가 있다, 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굳게 붙들어 감싸주시는 자비하신 주님 안에서 밤에나 낮에나 은총의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57 믿음으로 사는 사람 (2019.9.15.) 홍목사 2019.09.15 8
» 아시는 주님 (2019.9.8.) 홍목사 2019.09.09 15
855 신자의 자리 (2019.9.1.) 홍목사 2019.09.01 26
854 나무와 열매 (2019.8.25.) 홍목사 2019.08.25 24
853 인생의 화룡점정 (2019.8.18.) 홍목사 2019.08.18 25
852 스데반의 역사인식 (2019.8.11.) 이계준 2019.08.12 25
851 오늘의 주인 (2018.8.4.) 홍목사 2019.08.04 40
850 구하는 사람에게 (2019.7.28.) 홍목사 2019.07.28 32
849 주님의 일 (2019.7.21.) 홍목사 2019.07.21 24
848 살바도르 문디와 그의 배 (2019.7.7. 류성렬 목사님 설교) 신반포 2019.07.20 28
847 가서, 이와 같이 하여라 (2019.7.14.) 홍목사 2019.07.14 26
846 직업과 소명 (2019.6.30. 청년헌신예배) 홍목사 2019.06.30 28
845 우리나라와 하느님 나라 (2019.6.10. 미국 LA 원로목사회 설교) 이계준 2019.06.28 19
844 일어나 먹어라 (2019.6.23.) 홍목사 2019.06.23 27
84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019.6.16. 삼위일체주일) 홍목사 2019.06.16 16
842 표준어와 방언 (2019.6.9.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9.06.10 19
841 주님의 당부 (2019.6.2.) 홍목사 2019.06.02 22
840 신앙의 눈 (2019.5.26.) 이계준 2019.05.27 32
839 새 계명 (2019.5.19.) 홍목사 2019.05.19 41
838 만민을 위한 복음 (2019.5.12. 어버이주일) 홍목사 2019.05.12 1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3 Next
/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