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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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의 주님

 

본문: 시편 145:7-21; 누가복음 20:27-38

설교: 홍정호 목사 (2019.11.10. 성령강림 후 제22)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를 아들을 자기 형에게 세워주어야 한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고, 그 다음에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와 더불어 올 한 해의 신앙순례도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11월 마지막 주일이면 2019년 교회력이 끝납니다. 12월부터는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과 함께 2020년 교회력이 시작되고, 새로운 한 해의 신앙순례가 시작됩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의 신앙순례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마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오늘의 복음은 누가복음 2027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두개파 사람의 부활논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선 장인 누가복음 19장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성전 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의 행동은, 유대 당국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위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멀리서부터 제물을 가지고 오기 힘든 이들도 있을 테니, 성전에 제물을 파는 상인들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의 상과 의자를 뒤엎고 쫓아버리셨으니,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이 생각하기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이 오늘날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큰 교회들을 보면 교회 건물 1층에 자동현금인출기(ATM)가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예 은행이 교회 1층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시대 제물은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라, 돈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염소나 비둘기 드리지 않고, 각자 정성스럽게 준비한 헌금을 드립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교회 1층에 ‘ATM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하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내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며 교회 1층에 마련된 ATM기를 모두 부숴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교회 1층에 있는 은행에 들어가, 직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고, 성전에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곧바로 신고가 들어가고 체포되겠지요?

 

ATM기기를 둘 만한 큰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이 일을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의로운 사람이구나, 우리가 반성해야지이렇게 생각할까요? 글쎄요. 아마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일벌백계하고,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먼저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신 이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거센 공세가 이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들이기 위한 빌미를 잡기 위해 여러 곤란한 질문들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0장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이어진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특별히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2.

 

율법을 담당하는 바리새인들과 제의를 담당하는 사두개인들은 유대 사회의 양대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물론 과격행동파라고 할 수 있는 젤롯파과 내면적인 영성을 제일로 추구하는 에세네파가 있었지만, 그들은 각각 왼편과 오른편의 극단을 지향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같은 사회 지도층의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모두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만, 그들은 서로 앙숙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과 관습을 중시한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사회의 중간계급에 속했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사회의 핵심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반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귀족계급에 속한 유대사회의 유력자들로서 지극히 현세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정치적 색채가 강한 이들이었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은 제사장 사독’(zadok, 왕상 1:39)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두개파는 이 사독의 역할을 계승한 이들이기 때문에 당대의 제사장직을 독점했고, 귀족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두개파의 관심은 현실의 변혁이나 내세의 영광에 있지 않고, 오직 현세의 기득권을 잘 유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이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두개파 사람들이 앙숙인 바리새파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자주 했던 질문이 바로 부활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주특기인 부활에 관한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져 그분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면서 부활의 이른바 존재론적(ontological) 성격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지 않으시고, 부활의 의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논쟁은 부활 신앙의 초점을 벗어난 것이고, 초점을 벗어나 제아무리 정교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한들 그것은 부활 신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본래의 뜻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부활에 관한 신앙에 있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정신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20:38) 하는 것입니다.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인이 나중에 누구의 아내가 될지 하는 질문은, 부활 신앙이 추구하는 근본정신과 참으로 거리가 먼 질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죽음마저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몰락에 맞서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의 끝인 죽음마저도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믿음을 부활 신앙은 선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을 빼놓고, 부활의 존재론적인 측면만을 언급하며 부활이 있냐, 없냐, 존재하냐, 안 하냐를 놓고 논쟁하며 화려한 언변을 뽐내는 것은, 예수 정신을 잃어버린 신학이 존재론(ontology)과 결탁하여 빚어내는 풍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신학을 한다고 하면,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을 배제한 채 존재론적인 진술들, 다시 말해 교리적인 진술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로 신앙의 진정성을 판가름하곤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4.

 

감리교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이렇듯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신앙인, 교인이 되었으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 명목상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 세례교인이 되어 교회의 활동에 잘 참여하는 이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웨슬리 목사님은 이런 이들을 올모스트 크리스천’,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삶으로부터 성화(聖化)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웨슬리 목사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오늘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말씀드리자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관한 존재론적 인정이라는 형식상 믿음에 그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과 늘 동행하며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가 존 웨슬리 목사님이 말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 말씀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활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사두개인들은 웨슬리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목상 유대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유대교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잊은 채 그들의 구축해 놓은 체제, 이념, 제도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린 이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이룬 성취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그 어느 것도 철회할 마음이 없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오직 그 세계를 수호하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자부심에 찬 태도를 은근히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죽어 있는 너희와 같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산 자들의 주님이시다, 하는 꾸짖음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19년 한 해의 신앙순례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어떤 성숙과 진전이 있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처럼 살아온 시간은 아니었는지,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더 믿고, 자기 확신과 자부심에 가득 차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닫고 살아온 시간은 아니었는지,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물러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의 도약에 소홀했던 시간은 아닌지 우리 각자를 돌아보며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죽은 관념, 굳어버린 제도, 그리고 경직된 개인의 경험 속에 갇히시지 않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을 찾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의 주관자가 되셔서, 날마다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한 주간도 생생한 믿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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