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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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열매

 

본문: 시편 98:1-9; 누가복음 21:5-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9.11.17. 성령강림 후 제23)

 

[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치고, 나라가 일어나 나라를 칠 것이다.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생기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겨 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호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하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의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줄 것이요, 너희 가운데서 더러는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23번째 주일입니다. 2019년 교회력이 이제 한 주 남았습니다. 다음 주일을 마지막으로, 한 해의 신앙순례가 끝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합니다. 한 해의 신앙순례의 막바지에 이른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작은 묵시록으로 알려진 누가복음 21장의 말씀입니다.

 

1.

 

누가는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말씀을 약간 수정하여 오늘 본문에 배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맞이하실 종말을 목전에 두시고서, 장차 일어날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당대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고 생각하셨고, 종말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 때에 일어날 일 세 가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성전의 파괴입니다.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키며,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며 찬사를 늘어놓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21:6)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신의 생활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이 이방인 장군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에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입혔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오랜 시간 떠돌이로 살아가도록 만든 역사적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파괴를 예언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의 삶은, 성전이 무너짐과 동시에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큰 교회나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교회라는 공간의 핵심은, 장소를 중심으로 구성된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 공간이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교회는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소를 매개로 한 관계의 형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장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오랫동안 관계 맺는 것이 가능합니다. ‘에이, 교회가 아니라도 우리는 친하니까 잘 만나지, 우리는 가족이니까 지금처럼 잘 지내지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교회라는 장소가 주는 구속력은 생각보다 큽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와 상관없이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교회가 있기 때문에 가족도 지속적인 만남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장소는, 이렇듯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묶는 관계의 축입니다. 때문에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건물이 없어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맺어 온 관계의 파괴, 생활세계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멋진 말씀이 아니라, 참으로 뼈아픈 말씀입니다. 무너질 성전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을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무너질 성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장소가 없어도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 꼭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혼자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관계는 관계이되,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이해관계를 매개로 맺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신앙을 중심으로 맺는 관계가 교회의 핵심입니다.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나와 다른 이를 하나로 묶는 더 큰 가치, 하나님신앙에 귀속되어, 차이를 관용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공동체 안에 속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짓고 허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물이 있는 교회나 그렇지 않은 교회나, 하나님신앙 안에서 서로 다른 이들이 한 몸이 되는 체험, 이 관계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2.

 

둘째, 사이비 예언자들의 출현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이 파괴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을지 묻자,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이른바 종교 사기꾼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그 용어의 사용 맥락이 다릅니다. 이단은, 종교적인 용어입니다. 종교 안에서의 구분입니다.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한 종교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를 다룹니다. 정통의 입장에서 관용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면 이단이라고 칭하지만, 이 구분은 어디까지나 같은 종교 안에서의 구분이지, 그 종교 밖에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는 다릅니다. 사이비는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라, 사회학적 용어입니다. ‘사이비(似而非)’라는 낱말이 겉은 비슷하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경우를 지칭하는 낱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기독교 같지만,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는 경우, 그 종교는 사이비라고 불리고, 그 종교의 지도자는 사이비교주라고 불립니다.

 

이단도 문제입니다만, 더 큰 문제는 사이비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복음이라는 같은 이름 하에서 사람들을 복음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끌어가는 이들입니다. 어떤 것이 복음의 길이고 아닌지는, 복음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이들은 다 아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사이비 교주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복음의 말하는 진리와 사랑, 화해와 평화의 길이 아니라, 복음의 이름으로 복수와 증오심을 부추기고, 혐오발언을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정당화하는 등 복음과 거리가 먼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런 이들은 예수님 때에도 있었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불안을 파고든다는 데 있습니다. 시국이 불안정할 때, 경제적으로 불안할 때,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런 사이비 신앙이 파고들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이비 예언자들을 잘 분별하고,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

 

셋째는, 박해에 대한 인내입니다. 주님은 말세에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줄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주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 어떤 각오를 요구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가장 가까운 이들,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의 적대적 관계마저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을 오랫동안 학습 받아 온 우리로서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선생님이나 선배 등의 조언을 잘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로 부모님과 형제를 비롯해 가장 가까워야 할 이들과의 갈등도 불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의 역할이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들이 친근함을 앞세워 타협을 요구할 때에도 타협하지 말고 미움 받는 길을 택하며 참고 견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참 어려운 것이, 이런 고집 센 사람들이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과 자기 소신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에 숭고함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는 데 있습니다. 저것이 정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신인가, 하는 물음에 있어, 정말로 그런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대부분의 순간에서는 순교자의 자세보다는 협상가의 태도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해법을 모색하는 방식의 삶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매사를 순교자의 자세로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양보도 없고, 타협도 없고, 물러남도 없이, 오직 죽겠다는 각오로 덤벼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집스러움과 무모함을 순교로 정당화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가치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이 아닌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이해, 포용의 중요성을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순교가 점 하나라면, 일상은 점을 제외한 면적 전부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로서 지켜야 할 복음의 가치는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양보할 수 없는 가치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기반해서 다른 모든 가치들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의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가치들이 있기 마련인데, 교회와 신앙은, 그 가치의 중심을 세속적인 이념이 아니라, 하나님신앙에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하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이라 저보다 나이 든 분들도 많고, 전문직에 종사하다 뒤늦게 신학 공부를 하러 오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수업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는데, 어떤 분들은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다룰 때 아주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세상 모든 가치를 다 포용할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석가탄신일에 절에 갔다 왔다며 자신의 열린 태도와 교양을 아주 자랑스럽게 간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북 평화 문제로 주제를 옮겨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어떤 분은 남북 평화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저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열린 주장을 하는 반면, 동성애 문제나 이슬람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는데, 아주 다 열린 사고를 하는 분들, 종교간 대화도 해야 하고, 남북 평화 협력도 해야 하고, 동성애 이슬람 난민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자세를 보이는 이들 가운데에서, 이 먹고사는 문제,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내는 불평등과 차이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이미 해결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4.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누구에게나 이른바 인식론적 사각지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 조차도, 저만 알지 못하는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다만 제가 모를 뿐입니다. 진리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을 인정하고 말하느냐 아니냐는 상당히 큰 차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성찰의 여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상은 순교가 아닌 이런 성찰적 태도를 통해 건강한 삶에 이릅니다. 이렇듯 말세에 성전이 파괴되고, 거짓 예언자들이 득세하고, 박해 속 순교자적 자세를 요구받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내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21:19) 인내가 조롱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내보다는 속 시원히 할 말을 다 뱉어내고, 무슨 주장이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해서 동조자, ‘구독자를 얻어내는 것이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 펭수아시지요? ‘펭하!’ ‘, 김명중!’ ‘내가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나나요?’ 이런 펭수의 말에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뽀로로 이후의 EBS 최고의 캐릭터의 등극이라고들 합니다. 사장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부르고, 어디에서나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펭수에게서 사람들은 묘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인내, 관용, 타인에 대한 인정, 그런 것들은 학교 도덕시간에나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펭수에 열광하는 시대를 역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받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의 표출입니다. 사람들이 타인을 인정하는 여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에, 할 말을 거침없이 해서라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을 이끌어내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펭수가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타인에 대해 참고 견디는 여백이 줄어든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도 중요하고, 내 가치관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가치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어떠한 광풍이 다시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과목을 수강하러 온,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1학년 신입생들을 만나면 첫 시간 강의에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차이의 인정이라는 당연한 가치를 받아들이기 위한 피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차이의 인정이라는 우리 시대의 상식이 어떠한 갈등과 적대 속에서 상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5.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를 다시금 새겨야 하는 때입니다. 인내의 열매는 목숨을 얻는 것,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목숨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을 참고 견디는 가운데, 우리는 타인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래 참고 견디시며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향하여 오래 참고 견디므로 생명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한 주간도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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