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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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열매

 

본문: 이사야 11:1-10; 마태복음 3:1-12

설교: 홍정호 목사 (2019.12.8. 대림절 제2)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알려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인 옛 시간과 예수님의 탄신 이후 새 시간 사이에 놓인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시는 다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죄로 인하여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1.

 

누군가와의 좋은 관계를 지칭할 때 우리는 사이좋다라는 말을 씁니다. 타인과 나의 사이좋다는 것은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적절히 유지된다는 뜻일 겁니다. 너무 가까우면 자칫 무례해지기 쉽고, 너무 멀면 친밀해지기 어렵습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살다보면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는그런 관계에서 사이좋은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 체감하게 됩니다. ‘사이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좋을때 그 관계는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오래 지속되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관계가 됩니다.

 

사이좋다는 것은 비단 인간관계에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곤란하고, 너무 멀어도 어렵습니다. 너무 가까우면 열성 넘치는 광신자가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분의 뜻을 다 아는 양 행동하게 되고, 타인의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너무 멀면 냉소적 무신론자가 되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 먼 사람이 됩니다. 나의 오늘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의 존재도 선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값없는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갈 때 우리는 타인에게 무정하며, 무례하며,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분과의 사이를 좋게 유지하는 것, “이미 알지만 아직 모르고, 아직 모르지만 이미 아는이 역설을 관계에 있어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이 사이의 절기인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존재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이맘때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셨고,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하셨으며,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11:7-15)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이 요한에게 가르침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시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20세기에 있었는데, 바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입니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사해 북단의 쿰란지역 11개 동굴에서 약 800여 개의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기록 연대를 추정해 보니 기원전 2-3세기로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서, <에스더><느헤미야>를 제외한 202개의 구약 성서 사본과 외경, 위경, 그리고 각종 관련 문헌들이 포함된 방대한 양의 문서 더미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더불어 이 사해사본이 발견된 장소 주변에 공동체가 생활했던 취락군들도 함께 발굴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ity)라고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쿰란 공동체와 직간접적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광야에 살았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루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생활하며, 일군의 제자들이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이 쿰란 공동체의 금욕주의적 생활 방식과 닮은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을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선택된 자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면서, 자신들이 악으로 규정한 대상과 싸웠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쿰란 공동체와 세례자 요한 사이에 중요한 의례적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쿰란 공동체와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한 죄사함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공유했습니다. 왜 새로운 신학인가 하면, 유대교는 세례가 아니라,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종교적 의례와 전통을 고수하는 반면, 쿰란 공동체와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한 죄사함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쿰란 공동체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에 나서신 예수님에게 있어, 중요한 의례적 공통점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갈릴리에 오셔서 첫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첫 메시지는 이 한 마디였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15) 그분은 유대교의 전통에 충실한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식으로, 복음을 믿는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의 의례로서 의미 있는 것이지, 회개와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세례는 한낱 종교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그분의 첫 번째 메시지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회개(悔改)의 사전적인 의미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입니다. ‘메타’(meta-)라는 접두사는 ‘~이후’ ‘~를 넘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노이아’(noia)마음’, ‘생각’, ‘을 뜻하는 낱말인 누스’(nous)의 변형입니다. 그러니까 회개, 곧 메타노이아란, 마음을 이전과 다른 상태로 가져가는 것, 생각을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 너머로 가져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은 이전의 마음 상태에 머물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전의 생각에 머물지 않고, 복음을 향하여 생각을 돌이키는 존재가 바로 메타노이아를 체험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요한은 이 메타노이아,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 다른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결여된 채 행하는 세례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거센 비판을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알려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거센 비판을 한 까닭은, 그들이 세례라는 예식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예식이 추구하는 바 메타노이아즉 마음과 생각을 이전과 다른 상태에 놓는 회개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는 그들의 자부심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열리는 새로운 존재로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그들의 자부심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자신을 구별된 존재로, 대중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이들의 자부심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면죄부를 주고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대신, 그들의 허위의식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예언자적 선언을 했습니다.

 

4.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메타노이아인가,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 복음의 자리에 가져다 놓으려는 참된 결단인지를 돌아볼 때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메타노이아의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방금 메타노이아기적이라고 했습니다만,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 그 길에서 떠나 다른 길로 돌이킨다는 것은, 인간적인 결단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사랑을 힙입어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의 결단을 새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기적, 변화된 삶으로의 초대를 체험한 이들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풍성한 은총 누리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