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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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에 앞선 부르심

 

본문: 시편 139:1-6; 요한복음 1:43-5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14. 주현 후 제2)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름 받은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본문 35절에서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한의 말을 들은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외려 되묻습니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시몬과 안드레는 그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긴 했는데,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을 찾아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의 청을 허락하셨습니다. “와서 보아라.”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이 묵고 계시는 곳에서 그분과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에서 그 날을 함께 보낸 후, 안드레는 형 시몬을 만나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안드레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던 것일까요? 그 날 요한의 말을 듣고 주님을 따라간 시몬과 안드레가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겠습니다. 말이나 이해를 넘어, , 저분이 메시아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 어떤 계기들이 그날 안드레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

 

저는 요한복음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도,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그분과 반나절이라도 보내면서, 그분의 목소리와 말투, 말씀의 주제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의 미묘한 변화, 대화 중에 자주 쓰시는 낱말 등을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궁금한 게 많습니다. 그분의 걸음걸이는 어떤지, 앉아계시는 모습은 어떤지, 식사하시는 때는 어떤 모습인지, 사람과 사물을 대하시는 평소의 눈빛은 어떤지, 이런 소소한 특징들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말보다 더 중요한 진실들이 여기에 담겨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물론 복음서의 증언과 교회의 전통을 통해 예수님의 상()에 대한 구체적인 구성이 가능하기야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시몬과 야고보처럼 그분이 계시는 곳에 가서, 그분을 말씀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한 번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무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와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시몬의 아버지도, 시몬 자신도, 그리고 시몬을 아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를 갈릴리의 거친 파도와 씨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사람의 어부로 보았습니다. 맞습니다. 시몬은 어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친 바닷사람 시몬에게서 게바’, 곧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바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에게 이끌려 당신 앞으로 나온 시몬을, 게바로, 베드로로 명명하심으로, 당신의 나라를 위한 사역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시몬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그를 요한의 아들, 어부 시몬으로 부르며, 그 호명에 합당한 역할과 정체성을 그에게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거칠고 고집 센 한 사람의 존재에서 든든한 반석 베드로를 불러내신 겁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이들이 경험하는 존재의 새로운 지평입니다.

 

3.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서 등장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 사람, 빌립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빌립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믿어라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실 때에도(4:18-19), 알패오의 아들 세관 레위를 부르실 때에도(2:14), 당신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은 부자 청년에게 응답하실 때에도(19:21), 그리고 오늘 빌립을 부르실 때에도 모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하자고 부르시면서, ‘믿음을 먼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일을 하는 내내 필요한 것이겠지만, 첫 걸음을 떼는 데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 반대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일을 안 하니까 믿음도 안 생기는 겁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하자고 부르실 때에 믿음이 아닌 행동을 먼저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숙고하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내년 삼일운동 100주년의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자는 취지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 강연자로 오신 한 원로 역사학자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이 울림을 남겼습니다. “삼일운동 당시에는 교인이 적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믿을 만한 사람이 믿었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 믿었다는 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 사람이 교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대체로, , 저분이 교인이라니,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믿음이 앞서고 행동이 뒤따르는 게 아니라, 행동이 앞서서 나중에 보니 그분이 믿음도 있는 분이더라, 하는 것이 삼일운동 당시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믿습니다를 먼저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겸손한 행동이 앞선 이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는 믿음이 앞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함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배워서 알고 있는 전통과 지식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에 따르면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 믿으시오가 아니라, “와서 보시오입니다. 이 초청은 서두에 말씀드린 시몬과 안드레의 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한이 그대로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에게 와서 보아라하신 것처럼,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와서 들으시오”, “와서 믿으시오”, “와서 배우시오가 아니라, “와서 보시오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직접 한 번 와서 보고, 느껴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한 달에 한 번 예배 중에 고백하는 교회헌장이 있습니다. 맨 마지막 항목을 기억하십니까? “이 교회의 회원의 자격은 신자와 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한 다음에 그 성격과 목적에 찬동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결정한다.”

 

얼핏 들으면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신자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마치 한 개인의 결단에만 달려있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언제나 먼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신학적인 이해는 기본 전제로 하고, 그 위에 개인의 신앙적 주체성을 강조한 내용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또한 이 마지막 항목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향해 와서 보시오라고 말했던 것처럼, 신자가 되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이 와서 보고, 알아서 판단하도록 내맡기겠다는, 신앙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무나신자가 되기보다는 믿을 만한 한 사람이 믿도록, 교회로서의 본문에 더 충실하겠다는 데 그 본뜻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아무나신자가 되는 건 반가운 일 아닙니다. 믿을 만한 분이 믿고, 믿기로 결심한 이들이 잘 믿어야 합니다.

 

4.

 

빌립의 요청에 나다나엘은 냉소로 응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나쁘다기보다는 자기의 편견에 충실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다나엘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존재를 부정당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는 편견 앞에서, 그것도 지역과 출신에 따른 편견이라는 아주 부박한 편견 앞에서 당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당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래? 네가 그러면 나도 똑같이 대한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서로 인정 안 하면 누가 손해입니까? 셈할 것도 없이 나다나엘이 손해 아닌가요? 그런데도 그는, 속류로 칭해,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사람입니다. 나사렛 같은 데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도 없고, 나온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완고한 고집이었습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두고, 예수님은, 그 안에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셨습니다. 시몬에게서 교회의 반석 베드로를 이끌어내신 것처럼, 그분은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불러내셨습니다. 나다나엘의 본명은 바돌로메, 바르톨로메입니다. 바 톨로메, 톨로메의 아들 바르톨로메가 나다나엘의 이름입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냉소에 찬 톨로메의 아들 바르톨로메에게서 하나님의 선물인 존귀한 한 사람, 나다나엘을 보신 겁니다.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냉소를 보냈음에도, 주님은 바르톨로메 안에 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를 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5.

 

주님이 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바르톨로메가 나다나엘이 되도록 하시는 일이 그분께서 성령과 더불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모난 데 많은 한 존재에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를 삶의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기 전에, 우리를 먼저 부르신 분입니다. 우리가, 자기 인생의 무화과나무아래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먼저 보시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 안의 아름다움을 먼저 호명해 내시고, 그 일을 당신의 귀한 사역의 초석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와서 보라는 빌립의 요청, 교회의 부름 앞에 서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부름에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교회가 여러분을 부르기에 앞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겸손히 응함으로, 새로운 삶으로,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귀한 일꾼들로 날마다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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