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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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통로

 

본문: 시편 114:1-8; 마태복음 18:2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20.9.13. 성령강림 후 제15)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하고 애원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올해 교회력도 두 달여 남짓 남았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11:17)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는’(2:46) 데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으로 이웃의 건강과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신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건물만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각 사람이 교회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몇 년 하고 마는 행사가 아니라, 일평생에 걸쳐 살아가야 할 우리의 길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 잠시 떨어져 있는 이때는 불평이 아닌 은총과 감사로 채워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안으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밖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되새기고 공동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코로나로 어려운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의 성숙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2.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 용서를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마태복음 1815절 이하의 본문을 살피면서, 문제를 일으킨 형제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하신 말씀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징계가 아닌 화해의 용서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문제 있는 사람을 쫓아버리는 차가운 거리두기가 아니라,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가면서 화해와 용서의 길을 마련해 가려는 따뜻한 거리두기, 교회의 노력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찬송가 1,2,3,4절 가사를 비유로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1절은 자기 사랑, 내 권리, 내 자유에 대한 노래로 시작했어도, 2, 3, 4절로 가면서는 이웃사랑, 하나님사랑, 그리고 화해와 용서에 이르는 노래로 우리 삶의 노래가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 본문에 이어지는 주제이며, 더욱 체감적인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시는 것 같을 때, 현장에 어울리는 농담과 과장을 섞어 말씀하실 때, 가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변함없는 이야기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입니다. 재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자, 도구로 등장하기도 하기도 하고,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탐욕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재물이 축복이 되느냐 재앙이 되느냐의 차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한 믿음으로 재물을 다루는 사람인가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재물을 마치 신처럼 받들어 꼭 붙들고만 있으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반면에, 재물을 그 본연의 역할,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의 선물이자 도구로 여기는 사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실천하는 일에 재물을 선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맡기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요?

 

한 데나리온과 한 달란트는 사실 비교할 수 없이 큰 차이가 나는 돈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용직 노동자 하루 임금을 말하고, 한 달란트는 무려 15년 치의 임금을 말합니다. 대략 환산하면, 한 데나리온은 약 10만 원, 한 달란트는 약 5억 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비유에 등장하는 만 달란트빚진 종은, 지금 가치로 약 5조 원의 빚을 졌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게 큰 돈을 빚진 종이라는 말씀이죠. 만 달란트빚진 종이 왕의 은혜로 그 빚을 다 탕감받고, 파멸의 위기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살아 돌아오자마자, 백 데나리온, 100만 원 빚진 친구 멱살을 잡고 돈을 갚으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 친구가 참아달라하자,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거기 있게 만들었답니다. ‘만 달란트백 데나리온’, 5조 원과 100만 원이라는 과장된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청중들이 가장 피부에 와 닿을 비유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만 달란트의 값어치만큼이나 무거운 빚을 긍휼함으로 없애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러한 실천이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말로 로 번역된 헬라어 낱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석을 살펴보니, 대략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페이레마(οφείλημα)’라는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빚, 부채를 의미합니다.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오페일레마, 빚으로서의 죄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6:12) 하는 구절에서 사용된 낱말이 바로 오페일레마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 구절의 원어적 의미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 주시고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의미를 살려서 번역을 했습니다.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이처럼 오페이레마로서의 죄와, 이 죄의 용서로서의 구원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빚을 탕감받고 탕감해 주는 것과 같은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생활의 개념입니다.

 

둘째는, ‘하마르티아(αμαρτα)’라는 낱말입니다. ‘하마르티아과녁을 벗어나가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화살이 목표물에 가 닿아야 하는데, 목표물에 가 닿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이 하마르티아’, 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8:34) 라고 하셨을 때의 가 바로 이 하마르티아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신자로서 우리 삶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거기에서 빗나가 버릴 때, 그것이 우리에게 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파라프토마(παραπτωμα)’라는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미끄러져 넘어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부주의로 인해 저지르게 된 죄에 대하여 이 파라프토마라는 낱말을 씁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9) 하고 말했을 때의 죄과가 바로 파라프토마입니다. ‘파라프토마’, 죄과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과’, 파라프토마를 용서해 주십니다.

 

넷째는, ‘아노미아’(ανομα)입니다. ‘아노미아는 우리말 성경에 불법’(不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앞선 파라프토마가 모르고 짓는 죄를 말한다면, ‘아노미아는 알면서 짓는 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6:19) 하고 권면했을 때의 불법이 바로 아노미아입니다. ‘아노미아상태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바로 회개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파라바시스(παραβασις)’입니다. 이 낱말은 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쪽에 있다가 유혹에 빠져 안 좋은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파라바시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의 유혹에 빠져 넘어갔다고 할 때(딤전 2:14) 파라바시스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자신이 넘어가는 것도 죄이지만, 남을 넘어가도록 하는 것 또한 이 파라바시스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이처럼 신약성서에 나오는 라는 낱말은, 우리말로 다 같은 의미를 갖지만, 헬라어 용례에서는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 본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라는 바로 빚을 탕감해준다는 의미의 오페이레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셨다는 고백할 때 그 , ‘오페이레마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된 피조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무를 감당치 못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짐을 져 주시고, 우리의 빚을 모두 갚아주신 분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 만큼 무거운 죄를 탕감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의미가 바로 십자가 보혈의 은혜에 담긴 신학적 의미입니다. ‘내 죄 사함 받았다!’고 기뻐하고 노래하면서도, 백 데나리온 빚진 이들에게 모질게 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허투루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 달란트 은혜를 입었으니, 그만큼은 못 되어도, 우리도 은총의 통로가 되어 살겠다고 다짐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인지, 예수님은 생활 속 체감할 수 있는 재물의 단위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려 만 달란트만큼이나 큰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하면서, 작은 손해도 보지 않고, 작은 나눔도 실천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이 비유에서처럼 악한 종이라 꾸짖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앙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에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구원, 나의 죄사함, 나의 자유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긴 삶의 여정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우리의 눈길을 돌리고, 손길을 펼치는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이요, 우리가 걸어야 할 믿음의 길임을 믿습니다. 이 말씀을 품고,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전하는 은총의 통로로 살아가는 우리 신반포 교우 여러분과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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