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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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본문: 요나서 3:10-4:11; 마태복음 20:1-16

설교: 홍정호 목사 (2020.9.20. 성령강림 후 제16)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열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코로나로 달라진 일상에 긴 장마와 태풍 피해까지 겹쳤던 힘겨운 여름이 가고, 새로운 계절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있고,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만드셨으며,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고백하던 코헬렛의 한 구절(3:1-11)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교회와 우리 신자들에게 지금은 어떤 때인가, 더 많이 묻게 되는 요즘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천안의 한 교회 목사님이 교회에 써 붙이신 안내문 글귀를 뒤늦게 접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모임 잠정연기, 가정예배 전환)” 예배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19:18; 12:31) 하신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가르침을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여, 종국에는 우리도 주님처럼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목적도 이와 같습니다. 대면예배냐, 비대면예배냐의 문제는 예배의 본질이 아닌 방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예배를 통해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웃사랑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참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분의 한없으신 자비와 사랑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2.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서 3장 이하의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구약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에서도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목사안수를 받고 여러분과 나눈 첫 번째 설교의 본문이 바로 요나서 1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 중에 너무 울어서, 저도 당황하고 여러분도 당황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선주 장로님 손수건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나서는 목회자로서 저의 초심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입니다.

 

주님의 종 요나는 하나님께 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소명 앞에서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도망쳐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곳은 몰라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어떤 곳이기 때문인가요? 바로 적국의 심장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주전 8세기와 7세기에 맹위를 떨쳤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지금의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 강변에 있었던 제국의 심장이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니느웨는 적들의 도성이었습니다. 요나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렇기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모두 멸망한 상황에서, 요나가 자기민족의 원수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느꼈을 분노와 원망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망할 사람들인데, 망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게 마땅한 이들인데, 왜 하필 하나님은, 다른 많은 장소를 두고 저 원수들의 도성 니느웨로 가서 당신의 자비로운 뜻을 전하라고 하시는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요나는 순종이 아닌 도망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가 아닌, 니느웨의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땅이었던 반면, 다시스는 솔로몬의 선단이 각종 이국적이고 화려한 물건들을 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풍요롭고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왕상 10:22). 요나에게 다시스는,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잊고 살아가기에 더 없이 좋은 곳,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굽히며 인내와 순종으로 단련하는 대신 화려함과 풍요에 도취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주님의 명령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3:2) 결국 요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전하라 하신 뜻을 원수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3.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을 무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사십일 후 그 도성이 무너져 망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 성읍의 가장 높은 사람에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임금도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어버리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3:10).

 

요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따지듯 물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신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의 낙심이 얼마나 심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의로운 요나는, 저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못마땅했습니다. ‘이렇게 자비를 베푸실 거면, 당신의 백성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가 치욕을 당하기 전에 그렇게 하시든지, 그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와서 자비를, 그것도 원수들에게 자비를!’ 요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 요나는 니느웨를 빠져 나와 성읍 동쪽에 머물러 초막을 짓고 머물렀습니다. 니느웨가 정말로 어떻게 되는지, 지켜 볼 셈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낙심하여 지친 요나의 머리 위로 박 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시원한 그늘을 마련하여 편안히 쉬게 해 주셨습니다. 그 박 넝쿨이 뭐라고, 요나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그 박 넝쿨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동틀 무렵, 벌레 한 마리가 와서 그 박 넝쿨을 쏠아 버려서, 넝쿨이 그만 시들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까지 불고, 햇볕이 머리 위로 내리쬐자, 요나는 기진맥진하여 다시금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하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요나서는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는 박 넝쿨 하나에 기분이 좋아졌다, 또 죽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박 넝쿨이 뭐라고, 원래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자라나 생겨나게 하신 그 박 넝쿨이 지친 요나를 위로하고 안식을 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요나만 그런 것일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박 넝쿨들이 주는 위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재물이 될 수도 있고, 명성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박 넝쿨이 되어 지친 일상에 힘이 되기도 하고, 요나처럼 우리의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그런 경험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이 박 넝쿨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나요? 재물이 줄어들고, 명성이 예전 같지 않고, 사회적 관계에서도 이전과 다른 관계들을 접하게 될 때, 여러분은 요나처럼 낙심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날 때부터 있었던 우리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온 것은 아닙니까? 벌레 한 마리가 쏠아버리면 없어질 박 넝쿨이 주는 위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참 평안보다 더 크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이 사라져 또다시 낙심한 요나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수고한 것도 아니고,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본문은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끝납니다. 말씀을 듣고, 요나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나에게는 니느웨와 그곳 사람들이 원수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로 여겨졌지만, 하나님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운 사람들을 하나님도 미워해 주시면 좋겠는데, 내가 꼴 보기 싫은 그이를 하나님도 꼴 보기 싫어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도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4.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원수와 같은 이를 향해서도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이가 원수이니 벌하여 주십시오, 악마와 같은 저들을 불로 멸하여 주십시오, 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입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고, 솔직한 감정을 도덕적 잣대로 억누르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요나가 인간적인 마음으로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쳤지만,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잠시 길을 잃더라도 다시금 하나님의 뜻 앞에 서야 합니다. 요나처럼 인간적인 마음에 흔들리더라도, 거기에 붙들리지 않고,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길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요나서의 말씀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5:45b-46) 물으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 니느웨와 같은 대적이 땅이라 할지라도, 우리 앞에 세우시는 이들이 니느웨 사람들과 같은 원수라 할지라도,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진리와 사랑의 한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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