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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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율법과 예언서 본 뜻

 

본문: 신명기 34:1-12; 마태복음 22:34-40

설교: 홍정호 목사 (2020.10.25. 성령강림 후 제21, 종교개혁주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스물한 번째 주일인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올해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심정이 착잡합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자신이 개신교인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평생을 개신교인으로 신앙생활 해 오신 분들 가운데에도, 올해처럼 시험 드는 해가 없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지난주 정말 오랜만에 선배 목사님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교우들과 어디에 가서 목사님하고 부르니, 순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더라는 말씀에, 어쩌다 우리 개신교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라고 하신 말씀을 새기면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2.

 

여러분 아시듯, 개신교는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라는 의미입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되새기며 출현한 개혁된 교회가 개신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개혁된 교회인 동시에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이기도 합니다.

 

개혁은 500여 년 전 마르틴 루터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출발했을 뿐입니다. 개신교는 개혁된 교회를 개혁하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저항자들(protestant)’라는 별칭이 따라붙은 것을 보면, 개혁을 요구하는 개신교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집요하고 반복적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황제의 권력도, 교황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양심자유에 기대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온 루터의 후손들은,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면서 16세기 이후의 근대세계를 개척해 왔습니다.

 

개신교는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황제와 교회가 양분해 왔던 절대 권력을 수많은 미시 권력들로 쪼개며 결국 개인을 사회의 주체로 탄생시켰습니다. ‘민주주의제도의 밑거름을 마련해 왔습니다. 오늘날 국민은 대통령의 신하가 아니고, 오히려 위정자들이 국민 개개인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종의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 인권이 중시되는 사회, 시민 주체들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결정 참여와 결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회의 기틀은 개신교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된 근대화의 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의 결실과 관련하여, 개신교의 장점은 개방성과 다양성에 있다는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우리 개신교 신앙의 장점은 열린 마음,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 장점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이 장점이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개신교 신앙은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위기에 처합니다. 오늘날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개방성과 다양성이 억압되는 사회, 권위주의적 질서의 지배 아래 있는 사회에서 개신교 신앙은 진리와 자유의 빛을 발합니다. 우리사회의 과거처럼 말입니다. 6,70년대 청소년기를 보내신 분들, 남녀가 유별하다는 유교적 가르침 아래 자란 청소년들이 교회 와서 포크댄스를 배우고, 미국적 자유의 맛을 보던 시절의 교회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배우고 익히는 산 경험의 장소였습니다. 교회가 좋아하는 남학생, 여학생의 얼굴을 그야말로 마음 놓고볼 수 있었던 어쩌면 유일한 사회적 장소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가 시행된 80년대 말 이후 개신교는 교회마다 단기선교 붐을 일으키면서,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전환될 무렵의 해외여행 수요를 폭발적으로 가중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90대 이후에는 정치적 민주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 증진에 교회가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큰 교회에서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최신의 음향설비와 악기들을 구비 하면서 미국식 열린 예배를 도입했고, 낙원상가에 가면 할렐루야호산나와 같은 상호명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교회에서 자란 청소년들이 클래식뿐만 아니라, 락이나 힙합 같은 대중음악과 그 문화를 거부감없이 수용하고 선도하기도 했습니다. 1세대에 해당하는 크리스천 청년 예술가들, 이른바 교회오빠들이 오늘 한국이 문화컨텐츠 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대중음악 뮤지션들이 청소년기 교회에서 악기를 배우고 했던 과정은 우연이 아닙니다. 개신교가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는 교회의 장점을 살려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개신교 신앙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증대시키는 일에도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해왔습니다.

 

3.

 

문제는 오늘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떨까요? 얼마 전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사러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그 아이스크림 가게, 아이스크림만 해도 무려 서른한 가지가 있다는 그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눈앞에 너무 많은 선택지들, 너무 많은 선택의 자유들이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선택하면 저게 아쉬울 것 같고, 저걸 선택하자니 이게 아쉽습니다. 어릴 적 제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이라면, 비비빅과 부라보콘 둘 중에 하나를 사 주시곤 했는데, 무려 서른한 가지라니요! 좀 귀찮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갈 때마다 그냥 사 오라는 거 사옵니다. 카톡으로 보내준 바코드 보여주고 별 관심 없이 그냥 받아옵니다. 다양성을 향유 하기보다는 다양성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우스개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개방성과 다양성이 화두인 시대가 아닙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들, 너무 많은 자유들 앞에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한두 개의 갈림길이 아니라, 수십개의 갈래길 앞에서 결국 아무 길도 가지 않고 주저앉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권위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근대적 개신교보다 전근대적 경향이 강한 가톨릭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질서정연하고 체계가 잡힌 신앙생활, 단결하는 신앙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인이 사제라는 평등하고 개방적인 개신교의 주장보다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이 딱 나뉘어 있는 교리와 체계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누리는 길을 선호합니다. 말하자면, 아이스크림 서른한 가지 중 선택하기 보다는 비비빅이나 부라보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죠.

 

교회만이 아닙니다.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좌우를 살펴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려고 하기보다는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이야기에 편향되어서, 갈수록 극단적인 성형이 강해집니다. 민주주의는 피곤한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더 많아지고, 여기에 편승하는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표를 얻고, 득세합니다. 정치적 극단주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고, 20세기에 사라진 줄 알았던 인종주의와 극렬 민족주의, 배타적 국수주의가 슬며시 고개를 들면서 인류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이룬 정신의 진보를 위협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개신교는, 개방성과 다양성의 신앙을 장점으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개신교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4.

 

매년 종교개혁주일마다 반복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개혁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에 필요한 것은 더 세련된 비판, 더 급진적인 비판, 더 진보적인 비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실함(faithfulness)입니다. 여러 선택지가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복음의 길을 택하고, 그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에 위기에 처한 개신교 신앙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갈림길 앞에서 망설일 때는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길이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를 보아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우리 신앙의 길이 시작된 곳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한 길이요, 또 한 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이 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신명기 65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레위기 1918절의 말씀은, 율법 가운데 비교적 덜 중요한 말씀으로 묻혀 있었던 말씀입니다.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우선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늘 묻고 답해왔던 랍비들에게, 레위기 1918절의 말씀은, 앞선 신명기의 말씀에 비해 율법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계명과 동등한 위치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위기의 계명을 끌어올리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계명에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은, 감정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그분의 약속인 율법에 대한 신실함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감정적으로 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충실함을 지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감정적으로 사랑하느냐 아니냐가 제일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겨,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나도 그를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선행을 실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248개의 율법과 365개의 금지조항으로 된 율법의 본 뜻이 이 두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라 하셨습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교회가 잠시 길을 잃어버린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개방성과 다양성이 빛을 발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더 세련된 비판, 더 급진적 비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급진적인 말씀의 실천, 급진적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 자리를 돌아보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한 주간도 개혁된 교회의 신자로서, 개혁하는 신앙의 주체로 참 복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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