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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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권위

 

본문: 시편 111:1-10; 마가복음 1:21-28

설교: 홍정호 목사 (2018.1.28. 남선교회 헌신예배)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 어린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할아버지, 동화책에 보니까 누가 살았다하고 죽었다고도 하는데,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게 뭐가 달라요?” 할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얘야, 살아있는 건 따뜻하고 부드러운 거고, 죽은 건 차갑고 딱딱한 거란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따뜻하고 부드럽지. 그런데 죽으면 다 차갑고 딱딱해 진단다.”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들은 한 어른의 덕담을 옮겼습니다. 종교적 언어로 말한다면,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게 아니고, 숨이 멎었다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숨을 쉬면서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이들이 있고, 숨은 멎었으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따뜻함과 부드러움, 그것은 살아있음의 조건인 동시에 생명의 상태입니다. 반면, 차갑고 딱딱하다는 것, 그것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들 속에 자리 잡은 죽음의 조건이며, 죽음의 상태입니다.

 

오늘은 남선교회 헌신예배입니다. 제 짧은 경험입니다만, 한국교회 안에 가장 경직된 두 그룹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목회자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남선교회/남신도회 그룹입니다. 이 두 그룹의 특징은, 둘 다 남자들만 있거나, 남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그룹이라는 점입니다. 가끔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는데, 얘기를 경청하는 분들이 드뭅니다. 대부분 눈을 감고, 입 꼬리가 턱 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걷어 올린 채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면서도 민망해지는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되는 경험도 있습니다. 여성 참여자들이 다수인 자리입니다.

 

물론 여성이라고 다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건 편견이겠죠. 저의 경우에는 속회와 주중 성경공부 자리가 그렇습니다. 여성 참석자들이 대부분인데, 제가 느끼기에, 반응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지난 주 강추위에도 다 나오셨으니까요. 일단 주중에 시간을 내서 교회까지 나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교회 용어로 은혜 받을 준비가 된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인도를 잘 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교회와 하느님께로 향하니 몸이 따라가는 것이고, 더 중요한 건, 몸이 가니, 마음도 따라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저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다수인 자리에서는 대체로 부드럽고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굳이 성별로 구분하자면, 예수님도 여성들에게 환영받으시고 남성들, 그 가운데에서도 기득권을 쥔 남성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곁을 지킨 이들,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찾은 이들은 모두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남선교회 헌신예배인데, 여선교회 찬양예배가 되는 것 같네요. 우리교회 남선교회는 예외입니다.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들입니다, 그렇죠?

 

2.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을 남성과 여성의 특징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위적일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편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구분은 보다 근본적입니다. 성서는 살아있음과 죽음을 을 기준으로, 어떤 을 지니고 있는지로 구분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영(프뉴마)이라는 낱말이 23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여러 형태의 쓰임새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23번 가운데 성령(the holy spirit)으로 표기된 곳은 네 군데(1:8; 3:29; 12:36; 13:11)이고, 예수님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영을 뜻하는 곳이 세 군데(2:8; 8:12; 14:38), 더러운 영 혹은 말 못하는 영을 가리키는 의미로 14(1:23,26,27; 3:11, 30; 5:2,8,13; 6:7; 7:25; 9:17,20,25) 쓰였습니다. 나머지 두 번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후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과정에 등장합니다(1:10,12). (박원일,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6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은 실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과 같은 뜻입니다. 귀신이 우리문화 속에서 부정적 뉘앙스를 갖기 때문에 악한 영을 귀신으로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성령(聖靈)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귀신 자를 쓴 성신(聖神)입니다. 우리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고백하는 감리회 교리적 선언1930년에 제정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성령을 성신’, 즉 귀신 자를 써서 거룩한 귀신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로 제기되면서 1997년에 교리적 선언을 새롭게 다듬게 되는데,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1930년 교리적 선언보다 더 많은 교리적내용이 새로운 고백문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귀신이라는 낱말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거룩한 귀신 대신 거룩한 영, 즉 성령으로 그 낱말의 쓰임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귀신거룩한 귀신’, 즉 성령에 반대말입니다.

 

구역성서학자들은 본래 히브리 사상에는 천사나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나 부활, 심판 등의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일부 유대교 종파에서 악마를 초자연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게 된 이후라는 겁니다. 물론 에 대한 이해는 존재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은, ‘루아흐, 바람과 숨결입니다. 천사나 악마나 귀신처럼 인격화 되지 않고, 바람과 숨결처럼 자연의 은유로 표현됩니다.


3.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첫 번째 공적인 행적에 관한 이야기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악한 귀신’, 더러운 영을 내쫓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마가는 전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율법학자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는 대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면, 당연히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지, 목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마가는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후반부인 27절에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여기,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를 살펴보면 전치사 카타’(kata)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에 따라(according to)”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란, “권위에 따른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권위를 가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데, 그 바깥에 있는 권위를 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 권위를 따르나요? 권위에 근거해서, 자기의 주장을 확증하고자 할 때 권위를 따라 말합니다. 논문을 쓸 때 각주를 단다든지, 성현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다든지, 저의 경우에는 제 말이 아니라 성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자기의 권위가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권위에 의존해서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은 방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두고 사람들이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 “권위에 따른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권위가 아닌, 하늘의 영,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의지해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권위의 원천이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호칭을 선생”(4:38; 5:35; 9:17,38; 10:17,20,35; 12:14,19,32; 13:1; 14:4), “랍비”(9:5; 10:51; 11:21; 14:45) 등으로 제한합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단 한 번, 수로보니게 여인의 발언-“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에 등장합니다(7:28).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칭하는 표현이 무려 34회 등장합니다. 누가는 27, 요한은 33회입니다. 그런데 마가에서는 오직 단 한 번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칭하고, 나머지는 모두 선생랍비로 칭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선생님으로 불릴 뿐입니다. 이와는 달리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만 예수님을 랍비, 선생이라고 부르고(26:25,49)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26:22). (앞의 책, 69)

 

선생의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가르치는 내용, 가르침의 근거가 되는 원천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합니다. 내가 선생이니까 내 마음대로 가르쳐도 된다, 내가 성직자니까 내 마음대로 성서를 해석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든 자기의 해석이 불가피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만, 자기의 해석과 성서가 말하는 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경청하고 그 말에 순종하기까지 하니, 자기의 말이 곧 율법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권위에 따라, 하나님의 영에 따라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그때서야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해석에 근거해서 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며 사람들이 놀란 이유입니다.

 

4.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사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기의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언제나 성령의 뜻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기에 힘쓰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당신 자신의 권력이 아닌, 말씀의 권위로, 하늘의 영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더러운 영, 악한 귀신, 악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욕망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인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잃어버린 채 자기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 그들이 더러운 영, 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악한 영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기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영이란 개인적 의미인 동시에, 그 시대가 함몰되어 있는 집단적 광기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상처입고 억눌린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당신이 속한 사회에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살리는 권위를 죽이는 권력으로 억누르던 시대에 그분은 당신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권능을 의지하셔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 그분이 의지하신 영과 만난 이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전에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힘들, 성서가 악한 귀신이라고 표현한 그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옛 존재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이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혀 삶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생명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의 증언자이고, 전달자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하나님의 생명, 주님의 영이, 한 주간도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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