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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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

 

본문: 고후 5:16-21 연세대학교회

설교: 이계준 목사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거나 교회 가기보다 축구 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손흥민 선수처럼 등에 7번을 달고 초등학교 때부터 6.25 때 제주도 피난 가서까지 축구를 계속했습니다. 1970년대 초 연고전 때는 세계 초유의 대학교수 축구시합인 양교 교수팀의 대결이 있었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두 골을 넣어 연세대가 대승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대 축구부 부장으로 일본 원정경기에 다녀왔는데 지금 축구계 지도자인 김호곤, 허정무, 조광래가 그 당시 선수들이었습니다. * 제가 이 분야로 진출했더라면 FIFA 총재는 아니라도 한국축구협회 회장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축구는 11명이 뛰는 경기입니다. 모든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수는 미드필더라고 하겠습니다. 미드필더는 팀의 허리 같은 존재로서 수비도 하고 전방에 공을 분배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격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유럽에서 서울프로팀으로 복귀한 대표적 미드필더 기성용 선수가 그 모델입니다.

 

1.

 

오늘의 본문인 고후 5:16-21에서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 인류구원의 축구경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미드필더로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은 소원해진 인간과의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화해자로 세상에 보내시었고,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진 피조물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화해자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중심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신 화해의 현장은 억압과 빈곤, 싸움과 죽음이 만연한 로마 제국의 식민지 이었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소외되고 폐기 처분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비인간화에 앞장 선 무리들을 하느님의 형상 곧 참사람으로 회복하는데 투신하시다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반역자를 처형하는 로마의 형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사역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곧 정의라는 세로선과 하느님의 정의는 곧 사랑이라는 가로선의 교차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의미는 역사상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중세기 인물인 안셀무스에 따르면, 인간의 죄가 너무나 커서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속죄양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역시 중세기 인물인 존 던스 스코투스는 안셀무스와는 달리, 주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려 다가오시는 자기희생적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남미 해방신학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독재의 억압에서 민중을 구출할 해방자라고 하였고, 한국의 민중신학은 예수를 민중해방의 전거’(典據)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화해에 관한 이론들은 신학은 물론 교단과 신도들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아가페의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요한1서 기자의 말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8)

또한 여러분께서는 지난 20세기 말 캐나다의 문명비평가 맥루한 교수가 매체는 곧 메시지다.”(Media is message)라는 말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매체이자 실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화해의 매체이신 동시에 사랑의 실체로써 역사적 사명을 성취하신 삶의 완성자이십니다.

 

 

2.

 

예수께서 화해자로 오신지 2.0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만 보더라도, 초인적으로 이룩한 경제발전과 민주제도 덕분에 선진국 문턱에 성큼 다가섰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이 너무나 힘겨운 거친 들판과도 같습니다. 마치 100여 년 전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벌어졌던 그 시베리아의 동토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 짧은 역사의 과정에서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고 값비싼 희생과 죽음의 대가로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 뿐 내막은 제자리 걸음에 그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실상을 증명하듯 지금 우리 사회 전체는 이념과 계층, 남성과 여성, 늙은이와 젊은이, 다문화가정과 성 소수자 등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공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더욱이 큰 문제는 지도층 인사들이 오늘날 위기의 발원지라는데 있습니다. 사회의 중추적 책임을 감당해야 할 계층이 정치계나 종교계를 가릴 것 없이 이기주의와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거짓과 위선, 독선과 대립만을 일삼고 있으니 도덕적 해이와 정신적 피폐가 날로 확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분열과 충돌의 방파제로 자처하던 사회집단과 NGO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에 잠겨 있습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돈의 DNA에 관해 한 종교학자는 우리의 원시종교인 무교(巫敎)의 무아경이라고 적시하였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종교, 풍조나 유행이 일단 입력되고 나면 극단에까지 질주함으로써 결국 갈등과 분열, 파탄과 혼란을 출력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질적 실체가 서로 만나 새로운 창조로 승화되지 않고 자기 절대화를 사수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말하면 정반합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의 진화를 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어나는 듯하다가는 슬어지고 흥한다 싶으면 망해버리는 순환의 연속이 우리의 운명 같아 자괴감을 느끼곤 합니다.

근자에 한국 지성의 대변자 격인 이어령 교수가 조선일보 100주년 캡슬 속에 넣어 보낸 날개에서 품개라는 편지는 오늘의 이 위기감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이 교수는 날짐승의 날개는 날기도 하지만 알도 품는다는 뜻에서 날개와 대등한 품개라는 새 말을 지었는데, 이전 세대처럼 자기와 다르다고 싸우지만 말고 만물을 품고 살라는 후세들을 향한 권면의 메시지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품개50년 후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한 처방이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3.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하느님과 세상, 사람과 사람을 화해하는 미드필더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화해자란 말은 좌우나 상하 어는 중간에 서 있는 기회주의자나, 이중첩자 혹은 중개사도 아니고 천당 여행을 준비하는 관광객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정의와 공정과 평등이 짓밟힌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갑에게는 충고와 도전으로, 을에게는 돌봄과 치유로 화해를 실현하는 일꾼들입니다. 따라서 화해자의 집단인 교회는 누구보다 먼저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화해를 위한 특수 훈련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는 이는 누구나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존재인가?”하고 말입니다. 혹시 불행하게도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의 낯을 피해 숨어있는 가인 같은 존재는 아닌지요. 어떤 극단적인 입장에 서서 나와 다른 상대나 적수에게 인격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상처를 입히고 위선의 가면 뒤에서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혹은 자기 목숨 하나 구하려고 미디안 광야에서 목가적 삶에 도취한 모세와 같은 존재는 아닌지요? 최상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된 지대라고 여겼던 그 들판은 실망스럽게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지성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는 지금 거룩한 화해의 사명을 받았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결단하라.”는 양심의 소리로 변환되어 우리 마음을 울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화해의 사명을 깨닫고 일상에서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의 크리스천 정체성은 한낱 제도적 교회에 길들어진 교인의 정체성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편지가 문자에, 이 향기가 냄새에 그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 자체인 우리는 화해의 조형물인 십자가를 지는 오늘의 예수로 거듭나라는 함의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실존에 대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2:20)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절로 그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에 따르는 보상은 세속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편의를 위해 수고하는 택배기사들이 과로와 궁핍과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과 흡사할 것입니다. 우리가 좌우나 상하에 치우침 없이 사랑과 정의의 십자가를 지고 화해를 위해 투신할 때 모멸과 배신은 물론 죄 없는 속죄양처럼 거친 광야로 추방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의 화해적 역할은 모든 이분법과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멋진 신세계 곧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밝아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의 맥락에서 볼 때 지난 미국의 대선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가 미국 안에서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과의 갈등과 분열의 연속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승리가 예상되는 바이든은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화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성장기의 가난과 가정의 비극적인 경험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그리스도의 사절이란 사명의식을 지니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이든이 화해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망가진 미국이 다시 신세계로 환원될 것이고 갈등과 분열의 세계가 평화의 세계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란 명칭과 사명이 특정인이나 특정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6월 우리 대학교회에 수십 년 다니시던 방 숙 박사께서 소천하셨습니다. 1980대 초에 그분을 이 교회에서 만나 근 40년 동안 인생의 선후배로, 목사와 교인으로 돈독한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방 박사께서는 예방의학자로서 국내외적으로 크게 활동하시면서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화해의 사명을 완성하시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평생 존경하는 그리스도의 사절들을 여러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입은 사람인데, 그 중에 방 박사 내외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을 큰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대학교회 담임목사로 15년 동안 장기 집권한 것을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화해자의 고귀한 사명을 위해 말없이 헌신하시는 수많은 교우들을 섬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사절로써 헌신에 헌신을 더하여 화해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으로써, 우리 대학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룩하는데 초석이 되고 시발점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착하고 신실한 종아,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입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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